3화
‹ ›백서연은 나를 지부장실이 아니라 건물 지하로 데려갔다.
"지부장실 아니에요?" 나는 물었다.
"거긴 나중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계단을 몇 층이나 내려간 건지 세다가 포기했다.
계단 하나마다 조명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꼭 '너 이제 돌아갈 수 없어' 하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지하 벙커 나오는 거 아니야?'
벽에는 낡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B1 - 자재 보관실]
[B2 - 폐기물 처리실]
[B3 - 특별 측정실 / 출입 제한]
B3까지 내려가니 서늘한 공기가 확 끼쳤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도는 게, 에어컨 값 아끼려고 지하로 밀어넣은 건 아닌가 싶었다.
"여기가 특별 측정실이에요." 그녀가 손짓했다.
문이 스르륵 열리는데, 자동문인데도 무슨 옛날 영화에 나오는 비밀 연구소 같은 느낌이었다.
방 한가운데 원형 마법진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소환당할 때 나오던 그 문양과 똑같이 생겼다.
'이거 무슨 소환 의식 같은데.'
혹시 저기 서면 이상한 이세계로 끌려가는 건 아닐까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거기 서보세요." 백서연이 말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원 안에 섰다.
발밑에서 문양이 스르르 돌기 시작하는데, 등골이 조금 서늘해졌다.
[정밀 마나 측정 시작]
[클래스 판정 중...]
[클래스 판정 중...]
[클래스 판정 중...]
로딩이 유난히 길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느린 로딩은 옛날 게임기에서나 보던 건데.
초등학교 때 형네 집에서 하던 콘솔 게임이 딱 이런 로딩을 자랑했었다.
화면 켜놓고 화장실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로딩.
백서연도 조금 지루한 얼굴로 서 있다가, 문양이 계속 도는 걸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 흔한 일이에요?" 나는 물었다.
"아니요. 보통 3초면 끝나요." 그녀가 대답했다.
'3초? 그럼 지금 몇 초째인 거야.'
체감상 이미 30초는 지난 것 같았다.
문양의 회전이 점점 빨라지더니, 갑자기 방 전체 조명이 깜빡였다.
'설마 고장 난 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기계가 고장 나면 나는 어디로 보내지는 걸까, 하는 불필요한 걱정까지 들었다.
마침내 결과가 떴다.
[클래스: 마도사 (희귀도: SS)]
[마나 그릇: 측정 불가 (한계 초과)]
백서연이 그 화면을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그 표정이 꽤 오래 유지됐다.
몇 초, 아니 거의 십 초 가까이 그녀는 화면만 보고 있었다.
"...한계 초과라는 표시는 나도 처음 보는데."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거 좋은 뜻이겠지?'
성적표 받았을 때 담임이 저런 표정 지으면 보통 안 좋은 쪽이었는데, 이건 반대인 건가 헷갈렸다.
"이거 좋은 거 맞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청 좋은 거예요. 근데 문제는..." 백서연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키를 재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등을 곧게 펴게 됐다.
"학생이 열다섯 살이라는 거죠." 나는 대신 말을 끝맺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정상 절대 실전 입장 불가예요. 근데..." 백서연이 말을 흐렸다.
'근데 뭐요.'
계속 이렇게 문장을 끝까지 안 맺으면 답답해서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근데 이런 재능을 그냥 견습으로 5년 썩히는 건, 저도 좀 아깝네요." 그녀가 이어 말했다.
요정처럼 생긴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요정이 저런 사업가적인 계산을 하는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협회 규정 중에, 지부장 직권으로 임시 '위탁 실습' 자격을 줄 수 있는 조항이 있어요." 백서연이 설명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설명하는데, 그게 꼭 학원 선생님이 시험 범위 짚어주는 것 같았다.
"등급이 낮은 던전, 그것도 사망 사례가 거의 없는 F급 한정으로요." 그녀가 덧붙였다.
[임시 위탁 실습: 발각 시 즉시 취소, 협회 외부 공개 금지]
그럼 그렇지,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시스템 메시지 하나 뜰 때마다 조건이 하나씩 붙는 게, 무슨 헬스장 3개월 무료 체험 이용권 약관 같았다.
"근데 이거 왜 저한테 해주시는 거예요?"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이런 좋은 조건을 그냥 던져줄 사람은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세상 살면서 몸으로 배웠다.
백서연이 잠시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조금 전까지의 업무용 표정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저도 동생이 있어요. 학생이랑 비슷한 또래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애가 이런 재능이 있었으면, 저는 협회 규정 따위 무시했을 거예요." 그녀가 웃었다.
웃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매는 그대로 서늘한, 그런 웃음.
'뭔가 이 사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진지한 사람이구나.'
첫인상은 그저 친절한 지부장 정도였는데, 이제 보니 뭔가 자기만의 사정이 확실히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할래요, 말래요?" 백서연이 팔짱을 풀며 물었다.
"당연히 합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생계가 걸린 문제 앞에서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고민이라는 사치는 통장 잔고가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부리는 거였다.
백서연은 나에게 작은 반지를 건넸다.
반지는 은색이었는데, 손에 쥐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아이템: 위탁 실습생용 마나 위장 반지]
[효과: 신원 조회 시 등급 상향 표시, 위기 상황 시 3회 한정 강제 귀환]
"이게 학생 목숨줄이에요. 아껴 써요."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3회.
딱 세 번.
그 이상은 죽어도 도움을 못 받는다는 뜻이었다.
목숨줄이라는 표현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짜 딱 세 번인 거죠? 네 번째부터는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나는 다시 확인했다.
"네 번째부터는 학생 실력으로 살아나와야 해요." 백서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세 번의 목숨. 게임 오락실에서 백 원 넣고 세 번 죽으면 게임 오버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이번엔 오백 원 더 넣을 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이건." 백서연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F급 던전 '초록 늪지' 입장 허가서]
"내일 새벽에 입장해요. 새벽엔 감독관 교체 시간이라, 눈에 덜 띄어요." 그녀가 말했다.
"몇 시요?" 나는 물었다.
"새벽 다섯 시. 정문 아니고 뒷문으로 오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뒷문이라니, 무슨 밀수업자 접선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며 손이 살짝 떨렸다.
무서운 게 아니라, 흥분이 섞인 떨림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대문짝만한 기회가 온 적이 있었나 곱씹어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질문 있어요?" 백서연이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사실 질문이야 백 개도 넘게 있었지만, 이 이상 물어봤다가 그녀가 마음을 바꿀까 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간판들, 편의점, 치킨집, 그리고 협회 소속 던전 안내소까지.
이 도시 어디에나 던전이 있고, 어디에나 헌터가 있는데, 나는 이제 그 틈에 겨우 발끝 하나를 걸친 셈이었다.
'이걸로 진짜 돈을 벌 수 있는 건가.'
F급 던전 클리어 보상, 대략 이백만 원.
두 달 치 우리 집 생활비였다.
서인이 교복도, 도현이 준비물도, 쌍둥이들 겨울 외투도 다 이걸로 해결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숫자를 굴려보는데, 이백만 원이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로또 1등도 아니고 그냥 던전 클리어 한 번인데, 손이 다 떨렸다.
집에 도착하니 서인이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부엌에서 나는 라면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오빠, 오늘 알바 잘렸어?" 서인이가 물었다.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묻는 게, 걱정하는 건지 그냥 궁금한 건지 헷갈렸다.
"아니, 좋은 일 생겼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뭔데?" 서인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젓가락을 든 채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꼭 강아지 같았다.
"내일부터 오빠가 좀 위험한 일 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위험한 거면 하지 마." 서인이가 바로 정색했다.
'그럼 그렇지,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서인이는 늘 이런 식이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애.
"안전한 거야. 진짜." 나는 거짓말을 조금 얹었다.
사실 안전할지 어떨지는 나도 몰랐다.
F급이 사망 사례가 거의 없다고는 했지만, '거의'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거의 없다는 게 정확히 몇 프로인 거지.'
백서연에게 그것까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진짜 안전한 거 맞아?" 서인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
"맞다니까. 오빠가 언제 위험한 짓 한 적 있냐." 나는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고등학교 때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했잖아." 서인이가 바로 반박했다.
"그건... 그거는 카운트하지 마." 나는 말을 더듬었다.
서인이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라면을 그릇에 담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내일 새벽,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던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