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년가장 던전헌터

4화

새벽 다섯 시, 초록 늪지 던전 입구.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인생 처음으로 자발적 기상이라니.' 이러니 진짜 옛날 만화에서 시험 전날 밤새우던 애들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후드티를 대충 걸치고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백서연이 보내준 지도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초록 늪지, 폐건물 지하 주차장 B3.' 'F급, 위탁 실습 가능, 시간대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까지 감독관 미배치.' 감독관이 없는 시간대라니, 이거 완전 도둑 입시 같은 거잖아. 건물은 낡은 원룸 촌 뒷골목에 있었다. 간판도 다 떨어진 지하 주차장 입구, 그 구석 벽에 균열이 하나 나 있었다. '이게 던전이라니, 진짜 볼품없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던전이라고 하면 뭔가 웅장한 문, 신비로운 결계, 최소한 네온사인이라도 하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벽에 금이 간 정도였다. 누가 몰라서 그냥 지나가면 낙서인 줄 알겠다. 감독관 부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서연이 말한 대로였다. 부스 안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종이컵 커피와 볼펜 몇 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퇴근하면서 정리도 안 하고 갔나.' 나는 서류를 스캐너에 대고, 반지를 낀 손으로 문을 열었다. [F급 던전 입장 확인] [경고: 위탁 실습생, 안전 프로토콜 최소 적용] 경고문이 뜨는데 폰트가 왜 이렇게 태평한지 모르겠다. '최소 적용이라니, 뭐 죽어도 알아서 하라는 소리냐.'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확 달라졌다. 습하고, 초록빛이 은은하게 도는 늪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발밑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츄욱, 츄욱. 신발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아, 이거 세탁비 나가겠는데.' [던전 정보: 초록 늪지] [평균 클리어 시간: 6시간] [주 몬스터: 늪 슬라임, 독 개구리] 6시간이라니. 나는 오늘 하루 안에 끝내고, 저녁엔 도율이 유치원 데리러 가야 했다. 일정이 좀 빡빡했다. '6시간이면 딱 유치원 하원 시간이랑 겹치는데, 이거 진짜 곤란하네.' 나는 마음속으로 시간표를 짜기 시작했다. 7시까지 입구 근처 정찰, 8시까지 보스방 도착, 9시엔 클리어… 라고 계산하다가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던전 클리어를 출근 시간표 짜듯 하고 있냐.' 그때 늪 사이에서 뭔가 꿀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첫 몬스터가 나타났다. 초록색 슬라임이 흐물흐물 다가왔다. 크기는 축구공만 했고, 움직임은 느려터졌다. '약해 보이는데.' 나는 슬쩍 뒷걸음질 치면서 눈치를 봤다. 혹시 저게 갑자기 확 커지면서 덤벼드는 그런 반전 있는 몬스터일까 봐 살짝 경계했다. 하지만 슬라임은 여전히 느긋하게, 거의 산책하듯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방법은 몰랐지만, 몸이 알고 있었다. 손끝에서 파란 빛이 응축됐다. [스킬 자동 습득: 마나탄] 뭐야, 이건 또 배운 적도 없는데 자동으로 뜨는 거야. '이거 무슨 게임 튜토리얼도 아니고, 몸이 먼저 배운다는 게 말이 되냐.' 퍼엉! 슬라임이 그대로 터졌다. 초록 점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 방울이 내 후드티에 묻었다. '이건 진짜 세탁비 청구하고 싶다.' [늪 슬라임 사냥 완료] [경험치 획득]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원래 F급 던전이 이렇게 쉬운 건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가. 나는 잠깐 서서 손끝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희미하게 파란 빛이 남아 있었다. '이거 완전 만화 주인공 손 같은데.' 나는 이어서 늪지를 헤치며 나아갔다. 발밑에서 뭔가 계속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독 개구리 세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퍽, 퍽, 퍽. 늪물을 튀기며 세 방향에서 동시에 뛰어올랐다. [경고: 독 상태 위험] 경고를 알려주는 것 치고는 좀 늦은 타이밍이었다. '이거 경고문 뜨는 타이밍이 항상 한 발 늦는 거 아니냐.' 하지만 나는 이미 마나탄을 세 번 연속으로 쏘고 있었다. 퍼벙! 퍼벙! 퍼벙! 개구리 세 마리가 순서대로 터져나갔다. [독 개구리 3체 사냥 완료] [알림: 클리어 속도 상위 1% 진입] 상위 1%? 나는 잠깐 멈춰서 시스템 창을 다시 확인했다. 혹시 오타 아닌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예상 클리어 시간: 47분] [기존 F급 최단 기록: 3시간 12분] 뭐야, 이거 잘못 뜬 거 아닌가. '나 오늘 처음 던전 들어온 건데.' '설명서도 안 읽고 시험 백점 맞은 느낌이랄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계속 나아갔다. 늪지 안쪽으로 갈수록 물이 점점 깊어졌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늪물을 헤치고 걷는데, 뭔가 발밑이 미끄러워서 몇 번이나 균형을 잃었다. '이거 완전 학교 운동회 물놀이 게임 같은데, 목숨 걸고 하는.' 늪지 깊은 곳, 던전 보스가 나타났다. 거대한 늪 거북이었다. 등껍질이 웬만한 트럭보다 컸다. 등껍질 위에는 이끼와 작은 나무 같은 것까지 자라 있어서, 거의 움직이는 섬 같았다. "쿠오오오!" 거북이가 포효했다. 늪지 전체가 진동했다. '저건 좀 무섭게 생겼는데.' 나는 침을 삼켰다. 솔직히 슬라임이랑 개구리는 껌이었는데, 이건 스케일이 다르다는 느낌이 확 왔다. '만약 저게 나 밟으면, 그냥 서류상 실종 처리되는 거 아니야?' 나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손끝이 뜨거워질 정도로 응축됐다. 찌잉―! 빛이 점점 커지면서 응축되는 느낌이 손목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스킬 진화: 마나탄 → 마나 관통탄] 어어, 진화까지 하네. '이거 무슨 포켓몬도 아니고.' 나는 관통탄을 거북의 눈을 향해 쐈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이 늪지를 흔들었다. 늪물이 물기둥처럼 튀어 올랐다가 그대로 다시 쏟아졌다. 거북이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몸이 요동치자 늪 전체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나는 그 파도에 밀려 잠깐 균형을 잃었다가 겨우 버텼다. '이거 완전 놀이공원 파도풀인데, 죽을 확률만 백 배 높은.' 나는 이어서 두 번, 세 번 관통탄을 쐈다. 펑! 펑! 거북이가 결국 쓰러졌다. 거대한 몸이 옆으로 넘어가면서 늪 전체가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이게 F급이라고?' [던전 보스 '늪 거북' 사냥 완료] [F급 던전 '초록 늪지' 클리어] [신기록 갱신: 클리어 시간 22분 14초] 22분. 기존 최단 기록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숫자를 보고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22분 14초라니, 이거 무슨 라면 끓이는 시간보다 짧잖아.' [알림: 신기록 갱신에 따라 협회 본부로 자동 보고됩니다] 어, 잠깐, 그거 좀 곤란한데. 나는 몸이 순간 굳었다. 백서연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발각 시 즉시 취소, 협회 외부 공개 금지.' 신기록이면 자동 보고가 된다는 건, 아무도 말해준 적 없었다. '야, 이거 왜 아무도 말 안 해준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시스템 창을 다시 확인했다. [보상 지급: 200만 원] [등급 포인트 +50] 돈은 확실히 들어왔다. 계좌 알림 진동이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 돈은 좋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던전을 나오자, 이미 부스 앞에 사람 몇이 모여 있었다. 협회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태블릿을 들고 웅성거렸다. "이거 진짜야? 22분이라니." 한 직원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위탁 실습생 명단에서 뜬 거라던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다른 직원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최대한 눈에 안 띄려고 후드를 눌러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뭔가 커지겠는데.' '내일 신문에 나오는 거 아니야, 설마.' 나는 부스를 지나칠 때 최대한 발소리도 죽이고 걸었다. 혹시 누가 붙잡고 이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돌렸다. '저는 그냥 지나가던 실습생입니다, 22분이요? 그거 시계가 고장 난 거 아닐까요.' 다행히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통장에 찍힌 200만 원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일단 돈 벌었으니 된 거야.' 버스 창밖으로 해가 슬슬 떠오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 뒤로, 불안이 슬쩍 따라붙었다. '협회 본부로 자동 보고… 라고 했는데.' '그거 누가 보고 받는 건데.' 나는 폰을 꺼내서 백서연에게 문자를 보내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하지, 저 신기록 세웠는데 그게 자동으로 보고됐어요, 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사이, 폰이 먼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그 번호를 몇 초간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같이 덜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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