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몸을 굴려 겨우 피했다.
등 뒤로 나무 뿌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흙덩이가 튀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숨이 가빴다. 손바닥에서 땀이 흘렀다. 무릎에서는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바지가 이미 축축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피가 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 생각해야 돼.'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다시 까매졌다. 이런 게 죽기 직전의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마수는 코를 킁킁거리며 다시 나를 찾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건 확실했다. 방금도 내가 굴러서 위치를 바꾸니 잠깐 헷갈리는 눈치였다. 눈은 노란데 초점이 흐릿했다. 마치 안개 속을 보는 것처럼.
'냄새로 찾는다. 그럼 소리를 죽이면.'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바위 옆으로 붙었다. 숨을 아주 얕게, 천천히 쉬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저놈이 이걸로도 나를 찾아낼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좀 못 찾아라.'
바위 표면이 차가웠다. 등에 닿는 그 냉기가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줬다.
그 순간, 멀리서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 소리 같았다. 근처에 떨어진 내 배낭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까 도망치면서 던져 버린 그 배낭.
배낭 속에는 작은 라디오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밭일할 때 듣는 트로트 방송용 라디오였다. 넘어질 때 켜진 모양이었다. 하필 이 순간에.
"…서울 강남 지역, 삼십 분 전 상급 마수 출현이 확인되었습니다……"
뉴스였다. 이런 순간에도 뉴스가 들린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나는 귀를 기울였다. 지금 나한테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었는데도, 뭐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다.
"…현재 해당 지역은 마법소녀 협회 소속 대응팀이 투입되어……"
그때, 서울은 이런 풍경이었을 거다.
"저 새끼 뭐야. 왜 이렇게 커."
서유리는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색 머리를 세 갈래로 땋은 그녀의 시야에, 건물 삼 층 높이만 한 마수가 서 있었다. 도마뱀과 곰을 섞어놓은 듯한 형체였다. 몸 전체에 검은 갑각이 덮여 있었고, 그 위로 은은한 자색 막이 흘렀다.
"바리어 삼중이에요."
배은채가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벌꿀색 숏웨이브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삼중? 장난하나."
서유리가 씹던 사탕을 딱 깨물었다.
"은채야, 저거 A급이야."
"알아요. 근데 A급이 왜 강남 한복판에 나와요."
"그걸 내가 알겠냐."
서유리가 대검을 고쳐 잡았다. 손목을 한 번 꺾어 풀었다.
"뒤에 애들은?"
"미약 반응 마수 두 개 더 떴어요. 저기 신입한테 맡겼어요."
"저 애? 그 애는 그리 강하지 않은데."
서유리가 눈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미약 반응이잖아요."
"…믕."
서유리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정면을 봤다. 대검 끝이 아스팔트에 스치며 낮게 긁는 소리를 냈다.
"저거 바리어 뚫으려면 몇 방이나 때려야 돼?"
"제 계산으로는 최소 열두 번이요."
"열두 번? 그 안에 건물 몇 채 날아가겠는데."
"그래서 협회에서 대피 명령 이미 내렸어요. 언니만 빨리 끝내면 돼요."
"언니 소리 자꾸 하지 말라니까."
"급할 때만 하는 거예요."
마수가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건물 유리창이 흔들렸다. 근처 상가 간판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간다."
서유리가 몸을 낮추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배은채는 권총을 고쳐 잡고 그 뒤를 따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조심해요, 이번엔 진짜로."
라디오는 곧 신호가 끊겼다. 아마 배낭이 흙에 묻힌 모양이었다. 치직거리는 잡음이 몇 초 이어지다 완전히 끊겼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서울은 저런 걸 상대하는구나.'
마법소녀들. 상급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그 존재들이 여기, 이 산속에는 없었다. 여기 있는 건 나뿐이었다. 무기도, 바리어를 뚫을 방법도 없는 채로.
당연했다. 여기는 이름도 없는 시골 야산이었다. 협회의 대응팀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신고를 해도 최소 몇 시간은 걸릴 거고, 그 몇 시간을 나는 버틸 방법이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이걸 뚫어야 하지.'
내 능력이 뭔지도 아직 몰랐다. 마수를 만졌을 때 뭔가 보인다는 것만 알았지,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도움이 될지는 감이 안 왔다. 손을 대야 발동하는 능력이라면, 이 거리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마수가 다시 코를 킁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쿵. 쿵. 쿵.
나는 몸을 더 낮췄다. 바위와 내 몸 사이의 틈을 최대한 줄였다. 흙이 옷 속으로 파고들어 목덜미까지 까칠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버티면 뭐가 달라진다는 보장도 없었는데, 그냥 그 말을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나는, 그 소리가 정확히 바위 옆에서 멈추는 걸 느꼈다.
숨이 멎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발굽 소리도, 바람 소리도, 내 심장 소리도 전부 뚝 끊긴 것처럼 느껴졌다.
마수의 코가 바위 위로 올라왔다.
숨소리가 들렸다. 크고 습한 숨소리였다.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가 내 정수리를 스쳤다.
노란 눈이 바위 너머로 나를 내려다봤다.
초점이 흐릿한 그 눈이, 이번엔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들켰다.'
머릿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여기까지 버틴 게 다 소용없어진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마수가 앞발을 들어 바위를 그대로 내리쳤다.
콰앙!!
바위가 반쪽으로 쪼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