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능선을 오르는 내 발밑에서 눈이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어 숨을 죽였다.
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푹푹 빠졌고, 그럴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발을 뽑아 올렸다.
저 멀리 나무 그늘 사이로 스쳤던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설랑(雪狼).
겨울이 깊어지면 산 아래까지 내려와 가축을 물어가는, 이 근방에서는 가장 두려워하는 짐승이었고, 동시에 그 가죽 한 장이면 약값은 물론 겨울 양식까지 해결될 귀한 사냥감이었다.
나는 화살통에 남은 여덟 대의 화살을 손끝으로 짚어보았고, 두 대는 깃이 낡아 바람을 제대로 타지 못할 것이었으며, 나머지도 촉이 무뎌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여덟 대뿐이다.'
한 대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사부님의 기침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밤새 그 마른 몸이 이불 속에서 떨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새벽길을 나섰고, 항아리 밑을 긁어 지은 밥 한 그릇을 두고 나오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오늘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
사부님은 언젠가 화로 앞에 앉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활을 쏘는 자는 짐승보다 먼저 제 숨을 다스려야 한다. 숨이 흐트러지면 화살도 흐트러지는 법이니."
나는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면서도, 정작 짐승을 눈앞에 두면 심장이 먼저 날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부님은 마른 손으로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웃으셨다.
"급하면 놓친다. 놓치면 다음이 없다."
그 웃음소리가 요즘엔 부쩍 잦아든 기침 소리에 밀려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능선 아래로 소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희끄무레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쌓인 눈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을 낮추고 나무 밑동에 등을 붙였고,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삼키며 앞을 살폈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시렸다. 장갑을 낀 지 오래였지만 이 산의 겨울바람은 가죽 한 장쯤은 아무렇지 않게 파고들었다. 나는 화살통을 다시 한 번 매만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을까, 눈밭 저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스락.
작은 소리였지만 산속에서는 크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씩 돌려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하얀 눈 위에 회백색 털을 가진 짐승 한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고, 그 커다란 몸집과 형형한 눈빛만 보아도 그것이 설랑임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급하면 놓친다.'
사부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활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사부님이 가르쳐준 호흡법대로 숨을 아랫배까지 깊게 끌어내렸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는 사이 손끝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는 시위를 당기며 짐승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거리는 오십 보 남짓,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수백 번 넘게 이 산에서 짐승을 상대해왔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려 볼을 스치는 냉기를 살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약하게.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 조금은 흐를 것이었다.
설랑이 문득 고개를 들어 이쪽을 살피는 순간, 나는 화살을 놓았다.
파앙!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곧게 날아갔고, 짐승이 놀라 몸을 틀려는 찰나 그 목덜미 정확히 파고들었다.
짐승이 크게 울부짖으며 몇 걸음을 비틀거리다가 이내 눈 위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숨을 참았다.
혹시나 다시 일어설까 두려운 마음에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지만, 짐승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다가, 나는 비로소 활을 내리고 눈밭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발이 푹푹 빠지는 것도 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목구멍이 얼얼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설랑의 몸집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회백색 털은 겨울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가죽만 해도 은자 서너 냥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짐승의 몸을 살펴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가죽이었다. 이대로만 잘 벗겨낸다면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짐승의 목에서 화살을 조심스럽게 뽑아내며, 오랜만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 이 소식을 전하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약방 노인의 냉랭한 얼굴도, 겨울 내내 마른 죽으로만 버텨온 지난 날들도 이제는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약값을 내고도 남을 것이다. 좁쌀도 사고, 어쩌면 고기 몇 점도.'
머릿속으로 셈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짐승의 뒷다리를 밧줄로 엮어 등에 짊어질 준비를 하며, 이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이미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힘을 주었다.
밧줄을 단단히 묶는 손끝이 시렸지만, 나는 몇 번이고 매듭을 확인하며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짐승이 풀리면 그것만큼 낭패스러운 일도 없었다.
짐승은 내 몸집의 두 배는 될 만큼 무거웠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등에 올려 짊어졌다.
허리가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사이 눈밭에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한 걸음씩 옮겼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던 그때,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낯선 소리였다.
산속 깊은 곳까지 말을 몰고 올 사람이 이 시간에 있을 리 없었기에, 나는 등에 짊어진 짐승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몸을 돌렸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설랑을 겨눌 때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능선 저편, 눈길을 헤치고 다가오는 몇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말발굽이 남기는 발자국이 깊게 패이며 다가올수록, 그 형체가 점점 또렷해졌다.
화려한 자색 외투를 걸친 소년 하나와, 그 뒤로 검은 무복을 입은 두 사내가 말없이 뒤따르고 있었고,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색 외투는 이 산골에서 볼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값비싼 비단으로 지어진 것이 한눈에도 드러났고, 그 위로 눈송이가 떨어져도 소년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몰았다.
유현성.
청하현 현령의 아들이었다.
나는 짊어진 짐승의 무게도 잊은 채 그 자리에 굳어 섰다. 저 얼굴을, 저 웃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