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천장 몰딩이 눈에 들어왔다.
백색 크라운 몰딩, 폭이 적어도 15센티는 되어 보였다.
이 방 하나가 내가 살던 서울 봉천동 원룸보다 넓다는 걸 깨닫는 데 3초가 걸렸다.
몸은 열일곱 살인데 습관은 서른네 살에 멈춰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정보처리기술사 자격증을 세 개나 가진 시스템 엔지니어였고, 야근 수당은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월급은 320만 원이었고, 그중 절반은 원룸 월세와 통신비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사무실 파티션 안에서 모니터를 보다가 심장이 조여오던 순간이었다.
그때 화면에 떠 있던 건 배포 직전 마지막 커밋 로그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태성그룹 외동아들 강태오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이불은 시몬스 매트리스 특유의 냄새가 났다.
손끝으로 침대 프레임을 더듬어보니 원목이었다.
나는 잠시 누운 채로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이 몸이 진짜 내 것인지 확인했다.
저택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660평짜리 대저택이었다.
1층 응접실에는 이탈리아산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실제 시가 3억이 넘는다는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그림 앞을 지날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거 팔면 평생 놀아도 되겠다.’
그림 속 물감이 두껍게 발려 있어서 표면이 볼록볼록했다.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는 그림에 3억이라니, 나는 매번 그 앞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 몸의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전생에 700시간쯤 몰입했던 헌터 게임 '이터널 게이트'의 세계였다.
그 게임은 각성자 랭킹 시스템과 길드 운영 시뮬레이션이 결합된 특이한 물건이었고, 나는 그 세계관 위키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강태오는 그 게임의 최종 보스급 서브 악역, '재벌 후계자 강태오'였다.
게임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강태오는 신인 각성자 한서준을 착취하고 학대해 파멸의 씨앗을 심고, 결국 서준의 각성으로 몰락한다.
엔딩 컷신에서 서준의 두 손이 강태오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사이다 엔딩'으로 불리며 클립이 수십만 조회수를 찍었다.
나는 그 클립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그때는 그게 그냥 재밌는 게임 속 한 장면일 뿐이었다.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었고, 그 결말을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서만호가 방문을 두드린 건 여섯 시 정각이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서만호가 물었다.
"응, 벌써 일어났어."
내가 대답했다.
서만호는 마흔여덟 살의 집사로, 태성가에서 이십 년을 일한 사람이었다.
검은 슈트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만년필과 태블릿이 꽂혀 있었고, 그날의 일정을 초 단위로 정리해오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구두는 늘 광이 나 있었는데, 한 번도 흠집을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오전 열 시, 태성 길드 신입 각성자 배치식이 있습니다."
서만호가 태블릿을 내밀며 말했다.
"명단은 벌써 확인했어?"
내가 물었다.
"예, 총 열두 명입니다. 명단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서만호는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 넘긴 뒤 내게 건넸다.
나는 태블릿을 받아 명단을 훑었다.
김도윤, 박세리, 최지훈, 이수아...
이름 옆에는 나이와 각성 등급, 계열이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대부분 D급이나 E급이었고, C급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아홉 번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한서준.
나이 열여덟, 각성 등급 F, 지원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게임 속 정주인공, 한서준이었다.
원작에서 그는 태성 길드 최하위 잡부로 시작해, 강태오의 착취와 학대를 견디다 3년 만에 SSS급 각성자로 폭발적 성장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게임 내 스탯창으로 보면 초반 F급에서 최종 SSS급까지, 파워 인플레이션 그래프가 거의 수직으로 꺾이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그 성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강태오를 두 손으로 목 졌다.
‘여기서 만나는구나.’
나는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이름이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오전 열 시, 태성 길드 본관 1층 로비.
로비 천장은 12미터 높이였고, 바닥에는 태성그룹 로고가 은색 타일로 박혀 있었다.
로비 한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거기엔 태성 길드 소속 헌터들의 이번 달 랭킹이 실시간으로 떠 있었다.
신입 각성자 열두 명이 일렬로 서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서서 짧게 환영사를 했다.
환영사는 서만호가 써준 대로 읽었을 뿐이었다.
문장 중간에 몇 번 헛기침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근엄해 보였는지 앞줄에 선 신입 몇 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행사가 끝나고 명찰을 나눠줄 때, 나는 슬쩍 한서준 앞에 섰다.
키 168센티, 마른 체형, 낡은 운동화를 신은 소년이었다.
운동화 밑창은 한쪽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소매 끝이 해진 회색 후드티 아래로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게 보였다.
붕대는 새것이 아니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너, 이름이 한서준이지."
내가 물었다.
"네, 그런데요."
서준이 대답했다.
말투에 존칭도 경어도 별로 없었다.
신입 교육 때 도련님 얼굴을 안 외운 게 분명했다.
나는 그게 오히려 신기했다.
이 저택, 이 그룹 안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손목은 왜 그래."
내가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어제 훈련하다가 좀 삐었어요."
서준이 짧게 대답하고는 눈을 피했다.
시선이 내 얼굴 위쪽, 정확히는 이마쯤에서 멈췄다.
나는 그 붕대가 훈련 때문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원작에서 서준은 신입 시절 선임 각성자들에게 매일같이 맞으면서 시작했다.
게임 텍스트 로그에도 그 장면이 있었다.
'한서준, 훈련장 뒤편에서 발견됨. 전신 타박상.'
나는 그 로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조심해서 해."
내가 말했다.
"네, 뭐, 알겠습니다."
서준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른 신입들 쪽으로 가버렸다.
그의 걸음걸이가 살짝 절뚱거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었다.
‘저 붕대, 좀 이상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비를 나섰다.
로비를 나서는 내내 등 뒤에서 한서준의 발소리만 신경 쓰였다.
그날 오후, 나는 서만호에게 슬쩍 물었다.
"신입 배치 관리하는 팀장이 누구야."
"3팀 팀장 최두식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서만호가 되물었다.
"아니, 그냥."
나는 대답을 흐렸다.
서만호는 별다른 의심 없이 다음 일정을 읽어 내려갔다.
최두식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원작에서 한서준을 가장 처참하게 학대한 캐릭터의 이름이 정확히 최두식이었다.
게임 위키에는 그의 프로필 옆에 '악명도 최상급'이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 자식, 진짜 등장했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서류철을 든 채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일 아침, 최두식이라는 이름을 실제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목구멍 안쪽에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