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전생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낮게 웅웅거리는 방 안에서,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다시 덮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매트리스가 삐걱거렸다.
잠들 수 없었다.
17년 전, 정확히는 전생의 서른두 살 겨울이었다.
나는 야근으로 새벽 두 시에 퇴근했고, 팀장은 다음 날 오전 여덟 시에 회의를 소집했다.
그날 나는 집에 도착해서도 씻지도 못하고 노트북을 켜야 했다.
서류 파일 이름은 '3분기_실적보고_최종_진짜최종'이었다.
새벽 다섯 시까지 그 파일을 붙잡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팀장은 서류를 던지며 소리쳤다.
"이걸 보고서라고 냈어? 밤새 뭐 했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류를 주워 들었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하나씩 모으는 손이 떨렸다.
그날 야근비는 결국 받지 못했다.
회사는 '포괄임금제'라는 말로 그 시간을 지웠다.
그 기억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한서준의 붕대 감긴 손목이 그 시절의 내 손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류를 주워 들던 그 손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던 그 아이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남 일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사십 분이었다.
다음 날, 나는 서만호에게 태성 길드 3팀 훈련장 참관을 요청했다.
서만호는 결재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가 잠시 멈춰 섰다.
"도련님이 훈련장까지 직접 보시는 건 드문 일입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안경 너머로 나를 살피는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이번 신입들 성과 체크하려고."
내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실제로는 최두식이 서준을 어떻게 다루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훈련장은 지하 3층, 200평 규모의 마나 저항 훈련실이었다.
벽에는 방음 패널이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충격 흡수용 고무 매트가 깔려 있었다.
패널 사이 이음새마다 미세한 갈색 얼룩이 배어 있었다.
방음 패널의 존재가 이상했다.
소리를 막을 필요가 있는 훈련이라는 뜻이었다.
훈련용 마나 측정기가 벽 한쪽에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위로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최두식은 마흔한 살, 몸무게 100킬로가 넘는 체격에 목에는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 팔뚝에는 문신이 있었고, 그 팔로 서류판을 든 채 훈련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발소리가 고무 매트 위에서도 둔탁하게 울렸다.
"야, 한서준."
최두식이 소리쳤다.
"네."
서준이 대답했다.
어깨가 미리 움츠러들어 있었다.
"어제 그 마력 측정 다시 해봐. 왜 F등급이 안 오르냐고."
최두식이 물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서준이 대답했다.
"열심히 해서 F야?"
최두식이 소리쳤다.
짝!
손바닥이 서준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훈련장에 울렸다.
서준은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 끝이 살짝 벌어져 있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최두식이 말했다.
서준은 마력 측정기 앞에 다시 섰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측정기에 손을 올리는 순간에도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흔들려서, 기계가 몇 번이나 오류음을 냈다.
나는 그 장면을 참관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굳어 있었다.
‘저거, 원작 그대로잖아.’
원작에서 최두식은 서준을 신입 시절 내내 폭행했고, 그 학대가 서준의 각성 트리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 각성 이후, 서준은 강태오를 원수로 지목했다.
소설 속에서 그 장면을 읽을 때는 그냥 페이지를 넘겼을 뿐인데, 지금은 유리 한 장 너머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저길 막으면 어떻게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원작 스토리 개입은 언제나 위험했다.
서사의 궤도를 건드리면 어떤 나비효과가 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아이를 저대로 두면, 저 학대가 나에게 향할 원한의 씨앗이 될 게 분명했다.
원작 속 한서준은 각성한 뒤 강태오의 아버지가 소유한 시설을 무너뜨렸고,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서른 명이 넘었다.
‘막아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저 원한이 나한테 온다.’
나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렇게 되뇌었다.
관자놀이에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훈련장 밖으로 나오는 서준을 다시 마주친 건 그날 오후였다.
서준은 훈련복 상의를 손에 쥔 채 복도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뺨에는 아직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
내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서준이 짧게 대답했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자판기 버튼 위에 올려둔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최두식이 자주 저래?"
내가 물었다.
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신입은 다 그렇게 배워요."
목소리에 억양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에 외운 문장을 그대로 읊는 것 같았다.
그 대답이 나를 더 흔들었다.
서준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도 야근과 폭언을 당연하게 여기며 버텼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이렇게 산다', '이게 사회생활이다', 그런 말들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했었다.
‘당연한 게 아니야, 그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서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겁이 났다.
"손목은 다 나았어?"
내가 대신 물었다.
"이건 그냥 좀... 오래된 거예요."
서준이 대답했다.
말을 흐리는 걸 보니, 훈련 중 다친 게 아니라는 게 더 확실해졌다.
붕대 위로 살짝 비치는 멍 자국의 색이 최근 것이 아니라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만호를 불러 3팀의 최근 3개월 훈련 로그를 요청했다.
서만호는 태블릿을 든 채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이건 인사팀 소관입니다."
서만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직접 봐야 할 게 있어서 그래."
내가 말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눌러 담은 힘이 실려 있었다.
서만호는 잠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도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다.
그날 밤, 로그가 도착했다.
파일은 암호가 걸린 압축 폴더로 왔고, 서만호가 직접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서류를 넘겼다.
한서준 관련 상해 보고서만 세 건이었다.
골절 한 건, 타박상 두 건.
날짜는 각각 3주 전, 7주 전, 11주 전으로 찍혀 있었다.
모두 '자체 훈련 중 사고'로 처리되어 있었다.
보고서 하단에는 최두식의 서명이 아니라 다른 담당자의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필체가 전부 동일했다.
나는 그 서류를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이 서류 위로 노랗게 떨어졌다.
서류를 몇 번이나 다시 넘겨 보았지만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내가 손대야 하는 문제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창밖은 벌써 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서류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최두식을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