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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일주일 후, 재벌가·길드 연합 공개 행사가 열렸다. 장소는 강남 코엑스 대회의장, 참석 인원은 800명이 넘었다. 행사 시작 세 시간 전, 나는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 대기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넥타이 매듭이 자꾸 삐뚤어져서 세 번을 다시 맸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파우더를 두드리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오늘 할 말을 속으로 되짚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된다.' '주목받을 일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바닥에는 벌써 땀이 배어 있었다.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 나는 서만호에게서 마지막 브리핑을 받았다. "오늘 행사에서 도련님은 백년길드 성장 보고 발표를 하시게 됩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한서준 얘기가 또 나오는 거지." 내가 물었다. "예, 사상 최단기 승급 사례로 소개될 예정입니다." 서만호가 대답했다. "보고서 분량은?" 내가 물었다. "A4 세 장 분량입니다. 발표 시간은 5분 내외로 잡혀 있습니다." 서만호가 대답했다. 나는 그 세 장짜리 종이를 받아 훑어봤다. 숫자들이 빽빽했다. '3주 만에 D에서 C, 그리고 오늘 B라니.' '이 속도면 원작 흐름이랑 완전히 어긋나는데.' 나는 한숨을 삼켰다. 내가 원한 건 그저 조용히 파멸 플래그를 피하는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성공 사례의 주역이 되어 있었다. 무대에 오르자 대회의장 조명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좌석은 태성그룹 계열사 임원들, 각 길드 마스터들, 국가헌터협회 관계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앞줄 왼쪽에는 서은설이 앉아 있었는데, 그날은 나와 자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서준은 앞줄 게스트석에 앉아 있었다. 그날의 서준은 새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등급 표식이 C에서 다시 바뀌어 있었다. "한서준 각성자, B등급 승급을 방금 확인했습니다." 사회자가 발표했다. 장내에 짧은 탄성이 일었다. 서준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박수 소리가 3초 정도 이어졌다. 나는 그 발표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면 이제 진짜 원작 흐름이랑 완전히 달라지는 거잖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발표를 마치고 무대 옆으로 물러나자, 진행 요원이 다음 순서를 알리는 큐카드를 넘겼다. 행사 중반, 사회자가 특별 게스트를 소개했다. "오늘 특별히, 국가헌터협회 소속 SSS급 헌터, 유하늬 헌터님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장내가 순간 조용해졌다가, 뒤이어 박수가 터졌다. 무대 옆 통로에서 걸어 나온 여자는 키 175센티, 짧은 은발에 헌터 전용 슈트를 입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국가헌터협회 마크가 박혀 있었고, 걸을 때마다 슈트 관절 부위에서 마나 반응 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구두 소리 없이 걷는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전투화 밑창이 특수 처리된 모양이었다. 유하늬는 무대 중앙까지 걸어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원작에서 그녀는 강태오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 시선을 각오하고 있었다. '경멸이든 무시든, 그냥 조용히 받아넘기면 된다.' "강태오 도련님." 하늬가 입을 열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백년길드 이적 정책, 최두식 3팀장 건 처리 방식, 전부 확인했습니다." 하늬가 말했다. "...아, 그거는." 내가 대답을 시작했다. "보통 재벌가 자제가 하는 방식이 아니더군요." 하늬가 말을 끊고 이어갔다. "신입 각성자 하나를 위해 인사 체계를 통째로 뜯어고쳤다는 얘기, 협회에서도 이례적인 사례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 파멸 플래그 피하려고 한 건데, 왜 이례적인 사례가 됐지.' 하늬는 잠시 나를 뜯어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협회 쪽에서는 도련님이 뭔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 얘기가 돕니다." "...예측한 거 없습니다."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그 결정들은 전부 즉흥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하늬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런 셈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늬는 그 대답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겸손하시네요." 나는 그 웃음이 원작에서 강태오를 향한 혐오의 표정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하늬의 눈빛에는 경멸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눈꼬리가 살짝 접히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거, 원작이랑 다른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늬는 명함 한 장을 건넸다. 협회 직인이 박힌 것이었다. "다음에 협회 쪽에서 연락드릴 일이 있을 겁니다." 하늬가 말했다. 나는 그 명함을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행사가 끝난 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서준이 나를 붙잡았다. "도련님, 유하늬 헌터님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서준이 물었다.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인사 정책 얘기." 내가 대답했다. "저 그 얘기 다 들었어요." 서준이 말했다. "국가 최강 헌터가 도련님한테 관심 보이는 거, 이거 진짜 대단한 거예요." 서준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할 일 아니야." 내가 정정하려 했다. "아니에요, 저 이제 알겠어요." 서준이 말을 끊고 이어갔다. "도련님은 재벌가랑 국가헌터, 양쪽 다 끌어들이려는 거잖아요. 그게 도련님 큰 그림이죠. 저도 거기 낄 수 있는 거죠?" "...그런 그림 없다니까." 내가 다시 정정했다. 서준은 여전히 듣지 않았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뭔가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대기실 문 앞에서 서만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마에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도련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뭔데." 내가 물었다. "서은설 영애님께서, 오늘 행사에 도련님 옆자리로 좌석을 옮기셨습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이미 끝난 행산데, 이제 와서?" 내가 물었다. "자리 배치는 행사 중간에 이미 바뀌어 있었습니다. 도련님께서 발표에 신경 쓰시는 동안 진행팀에서 미리 조정한 겁니다." 서만호가 덧붙였다. "그럼 처음부터 근처에 계셨던 거잖아." 내가 되물었다. "...예. 정확히는, 유하늬 헌터님 대화가 시작되기 전부터였습니다." 서만호가 말을 이었다. "영애님이 유하늬 헌터님과 도련님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셨다고 합니다." 서만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촬영이라니. 어디까지 찍힌 거야.' '표정, 목소리, 명함 받는 것까지 다 담겼겠지.' 대기실 문 밖으로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일정한 속도로,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만호가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봤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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