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녀들의 마지막 방패

1화

이도현은 새벽마다 같은 자리에서 눈을 떴다. 브리지아 제3기지, 마법소녀 숙소동 관리실이었다. 창밖으로는 인공중력을 견디는 강화유리 너머 지구의 곡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늘도 무사히.' 그는 그렇게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협탁에는 낡은 수첩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소녀들의 이름과 그날그날의 상태를 적어두는 노트였다. 그는 습관처럼 첫 장을 펼쳐 오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메모했다. '서하늬, 수면 시간 부족.' 관리관이 되고 나서 생긴 버릇이었다. 숫자로 남지 않는 것들을 손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을, 그는 삼 년 동안 배웠다. 담당관이라는 직책은 소셜 게임 시절부터 존재했다. 전투를 지휘하지 않고, 마법소녀들의 일상과 정신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이도현은 그 직책을 맡은 지 삼 년째였다. 원래 그가 알던 세계에서, 이 자리는 그저 시스템 메뉴의 한 줄이었다. 클릭 한 번이면 호감도가 오르고, 대화창 하나로 관계가 정리되던 자리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그 한 줄의 텍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그의 앞에서 밥을 먹고, 웃고, 다치고, 울었다. 세면을 마치고 복도로 나서자 벌써 몇몇 소녀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부터 훈련장으로 향하는 아이들과, 늦잠을 자다 겨우 일어난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들 사이를 지나며 짧게 인사를 받았다. "관리관님, 좋은 아침이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얼굴로 웃어 보였다. 식당에는 이미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강모아가 접시 두 개를 쌓아 올리고 있었고, 유채린은 그 옆에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또 그렇게 먹으면 훈련 때 못 뛴다니까." "괜찮아. 다 근육으로 갈 거야." 강모아가 씩 웃었다. 유채린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근육이 아니라 뱃살로 갈까봐 걱정이지." "뭐? 다시 말해봐." "몇 번을 말해도 사실인데." 두 사람의 실랑이는 매일 반복되는 아침 풍경이었다. 그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이도현에게는 안심이 되는 소리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루가 무사히 시작됐다는 증거였다. 한쪽 구석에는 서하늬가 혼자 앉아 있었다. 검은 장발을 어깨 뒤로 넘긴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식판 위의 음식은 절반도 줄지 않은 채였다.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워도, 그녀의 자리 주변만은 유독 조용했다. "오늘도 혼자 먹네요." 이도현이 다가가 앉았다. "관리관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서하늬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신경 쓰는 게 제 일이라서요." "..." 서하늬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젓가락이 식판 위를 몇 번 오갔지만, 음식은 여전히 줄지 않았다. 이도현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굳이 더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물어봐야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라는 것을,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소녀들 사이에서 서하늬는 '야행'이라 불렸다. 최강의 마법소녀였고, 동시에 가장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다른 소녀들이 이도현을 편하게 대하는 것과 달리, 서하늬는 늘 거리를 두었다. 훈련에서도, 식사에서도, 심지어 부상을 당했을 때도 그녀는 누구의 손도 쉽게 잡지 않았다. 치료를 담당하는 소녀가 다가가면 짧게 "괜찮아요"라고 답하고 자리를 떠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도현은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그녀가 늘 관리실 앞 복도를 지나간다는 것을.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척한다는 것을. 처음 몇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삼 년이 지나는 사이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매번 같은 시간, 같은 걸음으로 그 복도를 지났다. 그리고 매번 관리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서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아이는 외로움을 인정하는 법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삼켰다. +++ 훈련장에서는 오전마다 실전 대비 훈련이 진행됐다. 열 명의 마법소녀들이 각자의 권능을 시험했다. 백설은 얼음 결정으로 방벽을 세웠고, 정라윤은 전기를 뿜어 표적을 태웠다. 문지아와 오수련은 짝을 지어 협동 공격 훈련을 반복했다. 훈련장 한편에서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소녀가 상비약을 정리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었지만, 이도현은 단 한 번도 이 풍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 중 누구라도 다음 실전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늘 마음 한구석에 새기고 있었다. 쉭- 서하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은 오라가 궤적을 따라 남았다가 흩어졌다. 표적이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훈련장에 있던 다른 소녀들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쏠렸다가, 이내 다시 각자의 훈련으로 돌아갔다. 서하늬의 실력은 이미 이 기지 안에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월귀와도 붙어볼 만하겠어요." 이도현이 훈련 기록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죠." 서하늬가 검을 거두며 짧게 답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이도현 쪽으로 걸어왔다. 평소라면 훈련이 끝난 뒤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보상은 이미 정해뒀어요." "보상이요?" "관리관님을 갖는 거예요." 서하늬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훈련 기록판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저 아이가 지금... 진심인가.' 그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건 제 소관 밖의 일이네요." "곧 소관 안으로 들어올 거예요." 서하늬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조금 전과 다를 것 없이 무심했지만, 등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유난히 곧게 흔들렸다. 이도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았다. '농담이라고 넘기기엔... 눈빛이 너무 멀쩡하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록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다른 소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모아는 노골적으로, 유채린은 은근하게,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마음을 드러냈다. 강모아는 훈련이 끝나면 꼭 이도현의 옆자리에 앉아 오늘 몇 개의 표적을 부쉈는지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유채린은 관리실에 서류를 가져다주는 일을 자청하며, 매번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다 갔다. 백설이나 정라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다른 소녀에게 오래 머물면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다. 이도현은 그것을 애정이라 부르기엔 조심스러웠다. 이들은 아직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전장에서는 최강의 전사였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아이였다. 전투 기록에 찍히는 숫자와, 식당에서 반찬 투정을 하는 얼굴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그는 여전히 낯설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저 아이들의 웃음이다.' 그는 그것을 되새기며 하루를 넘겼다. +++ 오후, 관리실로 호출이 왔다. 기지 사령부에서 보낸 긴급 전문이었다. "기밀문서 배송, 담당관 개인 열람 등급." 이도현은 봉인된 태블릿을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 전문을 가져온 병사는 다른 말없이 태블릿만 건네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평소라면 몇 마디 안부라도 주고받았을 텐데, 그날은 병사의 걸음마저 유난히 빠르고 굳어 있었다. 이도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런 방식의 통지는 처음이었다. 보통의 작전 지침은 사령부 회의를 거쳐 전달됐다. 회의 자리에서 소녀들의 배치와 작전 목표가 논의되고, 관리관인 그도 그 자리에서 함께 내용을 전달받았다. 개인 열람 등급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이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령부의 다른 관리관들조차 열람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태블릿의 봉인을 풀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구는 여전히 평온하게 돌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는 이 모든 사정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그는 그렇게 애써 생각했지만, 손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후 훈련 일정을 정리하고, 소녀들의 식단표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태블릿은 계속 그의 눈가에 걸려 있었다. 밤이 깊었다. 소녀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 이도현은 홀로 관리실에 남았다. 복도 저편에서 서하늬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관리실 문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웃었지만, 곧 표정을 지웠다. 태블릿의 봉인을 뜯었다. 화면에 뜬 제목 한 줄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카르네아데스 작전 시행 계획서.' 그는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제목 밑으로 이어지는 목차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방 안의 온도가 그대로 얼어붙는 듯했다. 목차의 첫 항목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서하늬, 강모아, 유채린, 백설, 정라윤. 이도현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마주하는 얼굴들의 이름이, 차가운 활자로 그곳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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