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좀비 아포칼립스

1화

다섯 시간 전, 나는 마왕의 목을 땄다. 정확히는 마왕이었던 존재의 심장에 성검을 박아넣었다. 찌이이잉- 검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5년짜리 프로젝트가 끝났다. '끝났다, 진짜 끝났어.' 머릿속으로 축포가 터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퀘스트 완료: 마왕 토벌] [보상: 명성 +999, 칭호 '진마왕살해자' 획득] 시스템 창이 뜨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칭호는 좀 오글거리는데... 그래도 인정.' 5년 동안 아침마다 눈뜨면 제일 먼저 확인하던 창이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니, 뭔가 허전했다. 마왕성 알현실. 무너진 기둥 사이로 먼지가 자욱했다. 천장 절반이 날아가서 하늘이 그대로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샹들리에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저거 언제 떨어지나 궁금하네.' 국왕이 직접 마차를 끌고 와서 나를 맞았다. 이런 게 진짜 왕이구나 싶었다. 우리 학교 이사장이랑은 격이 다르다. 이사장은 학부모 총회 때마다 검은 세단에서 내리면서 사람을 깔아뭉개는 눈으로 봤는데, 이 양반은 눈빛부터가 따뜻했다. "강도영 용사여, 그대의 공은 이 나라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국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뭘요." 나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그래서 퇴직금은 언제 주는데.' 5년간 몸으로 때운 대가를 역사책 한 줄로 받을 생각은 없었다. 국왕은 정말로 통이 컸다. 금은보화가 담긴 상자 열두 개, 용사 시리즈 장비 한 세트, 그리고 손목에 차면 마력이 저절로 채워진다는 팔찌까지. 거기다 뭔지도 모를 오래된 지팡이 하나까지 얹어주는데, 시녀가 "이건 마법사 조합에서도 경매에 안 부치는 물건입니다" 라고 귀띔해줬다. '그 정도면 그냥 부르는 게 값이라는 소리네.' 그걸 전부 아이템박스에 쑤셔 넣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국왕은 마지막으로 손바닥만 한 검은 마석 하나를 건네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봉인 마석이다. 내가 직접 봉인해 둔 것이니 평소에는 꺼내지도, 건드리지도 말거라." "정말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오면 스스로 반응할 것이다." 아이템박스는 이세계에 오자마자 받은 스킬인데, 용량이 무한이라 뭐든 넣을 수 있었다. 웬만한 이삿짐센터보다 나았다. 박스 안에 상자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병사들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나로서는 그냥 택배 앱에 물건 검수하는 기분이었다. "부디 다시 뵐 수 있기를." 국왕이 손을 맞잡았다. 손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왕도 왕이지 사람이구나 싶었다. "저는 됐어요, 폐하는 좀 오래 사세요." 나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옆에서 대신들이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다. '이 정도로 감동할 일인가.'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든 노인이 뭔가 중얼거리는데, 라틴어도 아니고 마법어도 아니고 그냥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귀환 마법. 5년 만에 처음 듣는 단어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했다. 집에 간다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그리고, 눈을 떴다. * 청담고등학교 보일러실. 용무원 숙직실 겸 창고로 쓰던, 그 좁고 곰팡내 나는 방이었다. 5년 전, 정확히는 어제 낮에, 내가 소환됐던 바로 그 자리였다. '……5년이 지났는데 왜 여기지.' 몸을 일으키는데 뼈마디가 삐걱거렸다. 이상하게 익숙한 냄새였다. 곰팡이랑 기름 냄새가 뒤섞인, 딱 이 방 특유의 그 냄새.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날짜가 그대로였다. 소환됐던 그날, 그 다음 날. '……미친, 진짜네.' 숫자를 세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아, 맞다. 이세계 시간이랑 현실 시간이 다르다고 했었지. 국왕이 그랬다. "저희 세계의 5년은 그쪽 세계에선 하루 정도밖에 흐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소름이 돋았다. 5년 치 근육통과 트라우마를 하루짜리 몸에 도로 쑤셔 넣은 느낌이었다. 거울이 있었으면 얼굴부터 확인했을 텐데, 여긴 거울도 없었다. 손을 들어봤다. 손톱 밑에 낀 마왕성 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거 봐, 이건 진짜 있었던 일이잖아.' 혼자 확인하고 혼자 안심하는 게 좀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쨋든, 마왕도 잡고 돈도 벌었으니 이제 정규직 전환이나 노려볼까. 비정규직 용무원 인생, 슬슬 청산할 때가 됐다. 교장한테 이 아이템박스 속 금은보화 좀 보여주면서 "저 이제 좀 대접받을 자격 되지 않습니까?" 하고 들이대는 상상까지 했다. 그런 김칫국을 마시며 문을 열었다. * 복도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원래 이 시간이면 청소하는 소리, 학생들 떠드는 소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조회 방송 소리가 뒤섞여 있어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광등 몇 개가 깨진 채로 늘어져 있었고, 어디선가 탄내가 났다. '화재라도 났었나.' 바닥에는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밟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교무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바닥에 낯익은 신발이 놓여 있었다. 이사장 아들, 정재훈이 신던 명품 운동화였다. 한 짝에 백만 원이 넘는다고 자랑하던 그 신발. 그 옆에는… 발이 없었다. 신발만. '……이건 좀 이상한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세계에서 5년간 시체는 지겹도록 봤지만, 여기서 보는 건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는 내 현실이었으니까. 마왕성에서 본 시체는 어차피 '적'이거나 '전쟁의 결과물'이었는데, 이 신발은 그냥... 며칠 전까지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도 안 마주치던 같은 학교 학생 것이었다. 창문 밖을 봤다.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이 모여 있었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관절이 반대로 꺾인 채 걷는 놈도 있었다. 피부가 벗겨진 채 회색으로 변한 놈도 있었다. 교복을 입은 놈도 있었는데, 넥타이가 반대로 감긴 채 목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저거… 설마.' 라디오 소리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용무원실 어딘가에 켜놓고 나간 라디오였던 모양이다. "…전국적으로 발생한 감염 사태는… 정부는 계엄을… 국민 여러분은 즉시…" 뉴스 진행자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 뒤로는 잡음뿐이었다. '……좀비네, 저거.' 5년간 마왕이랑 싸우다 왔더니 현실이 좀비 아포칼립스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전개, 옛날에 보던 B급 영화에서나 나오던 거 아니었나. 고등학교 때 야자 째고 몰래 보던 그 좀비 영화들 생각이 났다. 그때는 팝콘 먹으면서 웃으며 봤는데. 웃음이 나왔다. 실성한 웃음이었다. '이거 뭐, 마왕성보다 여기가 더 위험한 거 아니야?' 마왕성에는 그래도 규칙이 있었다. 레벨이 있고, 스킬이 있고,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전투였다. 저 밖에 있는 것들은 그런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봤다. 좀비 하나가 3층 창문을 뚫고 복도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낙하 충격으로 팔이 이상하게 꺾인 채였는데도, 그놈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켰다. 관절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통증을 못 느끼는 건가, 아니면 그냥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건가.' 그리고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놈의 동공은 없었다. 그냥 하얗게 흐려진 유리구슬 같았다. '……보통 사람은 저런 걸 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교과서에도 안 나오고, 이세계 매뉴얼에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무기가 없었다. 용사의 성검은 아이템박스 안에 있었고, 지금 내 손엔 청소용 밀걸레가 전부였다. '하필 지금 이걸 들고 있나.' 밀걸레 자루를 손에 쥐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마왕 잡던 용사가 이제는 대걸레 하나로 버텨야 한다니. 좀비가 관절 꺾인 팔을 흔들며 달려들었다. 속도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밀걸레를 들어 막으려는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의식보다 반응이 빨랐다. 5년간 매일같이 몸에 새겨넣은 감각이, 지금 이 순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튀어나왔다. 이런 걸 근육 기억이라고 하나. 이세계에서 배운 게 여기서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좀비의 이빨이 목덜미에 거의 닿기 직전, 나는 밀걸레 자루를 놈의 턱 아래로 밀어넣었다. 콱! 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루를 붙잡은 채 더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라?' 힘이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놈의 목을 부러뜨렸어야 할 힘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버티는 수준이었다. 마왕의 심복 정도는 한 손으로도 찍어눌렀던 나였다. 이 정도 좀비 한 마리에 이렇게 버거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몸이 이상했다. 팔에 힘을 더 줘보려는데, 뭔가 텅 빈 느낌이었다. 스탯 창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좀비의 손톱이 밀걸레 자루를 뚫고 내 팔에 닿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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