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좀비 아포칼립스

2화

밀걸레 자루가 반으로 부러졌다. '……어, 이거 실화냐.' 손에 남은 반쪽짜리 자루를 보면서 나는 잠깐 현실 부정에 들어갔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이건 멀쩡한 밀걸레였다. 청소 도구였다. 좀비 머리통을 후려까는 근접 무기가 아니라. 5년 전이었다면 저 정도 좀비는 손가락으로도 처리했을 거다. 아니, 손가락이 아니라 눈빛으로도 처리했을 거다. 마왕성 지하에서 튀어나오던 것들에 비하면 이건 유치원 재롱잔치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밀걸레 하나로 겨우 버티는 게 전부였다. 몸이 완전히 다른 사람 것 같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원래의 나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게 더 무서운 부분이었다. 놈의 손톱이 팔뚝을 긁었다.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다행히 살짝 스친 정도였다. '스친 것도 이렇게 아픈데, 제대로 맞으면 어쩌라는 거야.' 예전 같으면 이 정도 공격은 방어막이 자동으로 튕겨냈을 거다. 지금은 그냥 살로 맞았다. 사람 살로. 평범한 45세 아저씨의, 지방과 근육이 애매하게 섞인 그 살로. '생각할 시간이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템박스를 열었다. [아이템박스] 접근 완료. 머릿속에 목록이 떠올랐다. 용사의 성검, 용사의 갑주, 마력 순환 팔찌, 금은보화 열두 상자, 그리고 몇 개의 잡템. '다행이다. 이건 그대로네.' 왜 안심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아이템박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줄이 붙어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통장 잔고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마이너스는 아닌 걸 봤을 때의 그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은 통장이 문제가 아니라 목이 문제였지만. 성검을 꺼내려는데, 눈앞에 낯선 창이 떴다. [알림: 상태창 확인이 필요합니다.] '상태창? 이런 것도 되나.' 좀비를 걷어차며 뒤로 물러난 다음,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발로 차면서 상태창을 확인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좀비는 예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름: 강도영] [레벨: 1] [직업: 없음] [스킬: 아이템박스(고정)] [비고: 귀환에 따른 시스템 초기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스킬과 레벨이 초기화됩니다.] '……잠깐만.'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좀비가 다시 달려드는데도 반응이 늦었다. 레벨 1. 마왕을 잡은 용사가, 지금 레벨 1이었다.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5년간 쌓아온 스탯, 스킬, 전부 다 리셋이었다. 검술도, 신체 강화도, 마법 저항도, 전부 무(無)로 돌아갔다. 남은 건 딱 하나, 아이템박스뿐이었다. 마치 몇 년짜리 게임 세이브 파일을 실수로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소리 같았다. 그것도 튜토리얼 몬스터한테 죽을 뻔한 상태로. 초등학교 때 오락실에서 밤새 모은 코인을 동생이 실수로 다 써버렸을 때의 그 배신감이랑 비슷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다. 그때는 동생을 팰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스템을 팰 수가 없었다. 놈의 손톱이 다시 내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죽으면 스탯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다.'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예전 같으면 우아하게 피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바닥을 굴렀다. 허리가 아팠다. 좀비 하나 피하는데 이렇게 온몸이 다 아플 일인가. '이러다 진짜 죽는다.' 다급하게 아이템박스에서 용사의 성검을 꺼냈다. 손에 익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찌잉-! 검신이 은은하게 빛났다. 5년 동안 매일같이 잡았던 그 감각이 그대로 살아났다.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레벨은 리셋됐지만, 장비는 그대로였다. 국왕이 준 물건이니 국가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 지급품이었던 게 다행이었다. 계약서 조항 하나 잘 챙긴 게 지금 이렇게 목숨을 구할 줄이야. '스탯이 없어도 좋은 무기는 좋은 무기다.' 좀비가 세 번째로 달려들었다. 나는 성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놈의 머리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너무 쉽게 잘려서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밀걸레로 삼십 초 동안 실랑이하던 놈이었는데, 성검 한 방에 이렇게 간단히 정리될 일이었나. [알림: 좀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2 획득.] [레벨업까지 98 남았습니다.] '……레벨업에 100씩 필요한 거야? 좀비 한 마리에 2점?' 계산해보니 좀비 50마리를 잡아야 레벨 2가 됐다. 스탯은 없는데 노가다는 그대로 있는, 이런 불공평한 시스템이 어디 있나 싶었다. 차라리 수학 시험이 이렇게 채점됐으면 나는 진작에 낙제였을 거다. 50점 맞으려고 오십 문제를 다 풀어야 하는데, 그중 한 문제라도 틀리면 즉사. 이게 무슨 시험이야, 목숨 걸고 보는 수능이지. 하지만 지금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레벨은 1이어도, 성검은 여전히 성검이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아직 이 바닥에서 밥값을 할 수 있었다. 아니, 밥값이 아니라 목숨값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템박스를 다시 열어 마력 순환 팔찌를 손목에 찼다. 딸깍, 하는 느낌과 함께 팔찌가 손목에 감겼다. [마력 순환 팔찌 장착.] [마력 자동 회복 효과 적용 중.] 마력이 없으면 스킬도 못 쓴다는 걸 5년 동안 몸으로 배웠다. 이 팔찌가 없었다면 이세계에서 벌써 다섯 번은 죽었을 거다. 정확히는 세 번은 몬스터에게, 두 번은 동료의 실수로.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팔목에서 미약한 온기가 퍼지는 게 느껴졌다. 마력이 서서히 차오르는 감각. 당장 쓸 스킬은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든든했다. 빈 지갑에 카드 한 장 꽂혀있는 느낌이었다. '좋아, 정리해보자.' 레벨 1. 스킬 대부분 봉인. 신체 능력도 평범한 45세 아저씨 수준으로 복귀. 하지만 아이템박스는 그대로. 그 안의 장비들도 전부 그대로. 계단식으로 정리하다 보니 결론이 하나로 모였다. 스탯빵으로는 못 싸우지만, 장비빵으로는 아직 싸울 수 있다. '그럼 됐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런 건 진짜 용사가 할 일이었고, 나는 이미 계약 만료된 파견직 용사였다. 퇴직금도 없이, 퇴사 인사도 없이, 그냥 소환됐다가 그냥 돌려보내진 그런 파견직. 지금 필요한 건 딱 하나였다. 일단 살아남는 것. 거창한 명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마왕을 잡을 때도 사실 명분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때는 안 죽으려고 마왕을 잡았고, 지금은 안 죽으려고 좀비를 잡는다. 본질은 똑같았다. 복도 끝에서 또 다른 좀비 무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렁거리는 신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 아니 발소리라기엔 좀 이상한, 질질 끄는 듬직한 소리들이 겹쳐서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아마 여러 마리였다. '……저거 몇 마린데.' 숫자를 세보려다가 관뒀다. 어차피 세봐도 답은 안 나온다. 많으면 많은 거고, 나는 그저 살아있는 채로 여기서 나가는 게 목표였다. 나는 성검을 다잡았다. '그래, 좋다. 얼마든지 와라.' 속으로는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때는 마왕성 정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간 남자였다. 지금은 밀걸레 자루가 반으로 부러졌다고 좌절하는 남자였다. 레벨 1로 마주하는 좀비 무리라니, 이건 튜토리얼치고는 너무 하드코어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가까이, 더 가까이. 복도 저편에서 어렴풋한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숫자가 생각보다 많아 보였다. '……이거 진짜 튜토리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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