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문 쪽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이거 완전 망했다.'
생존자로 보이는 사람이 열댓 명 모여 있었다.
다들 후줄근한 차림이었고, 눈빛에는 공포와 의심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공포 칠, 의심 셋 정도의 비율이었다.
나 같으면 그 비율도 이해가 갔다.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 낯선 놈이 검을 들고 걸어오면 일단 도망부터 쳐야 정상이다.
"저기요, 방금 옥상에서 좀비를 그렇게…"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 그거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나는 손을 저으며 대충 웃었다.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 넘어갈 리가 없는데.'
'저 표정들 봐라, 하나도 안 믿는 눈빛이잖아.'
그래도 일단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직이 최선일 리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배터리를 아껴가며 켜놓은, 생존자용 임시 채널인 듯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뚝뚝 끊겨 들려왔다.
"…청담고등학교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이 좀비 무리를 단독으로 섬멸했다는 목격담이 SNS에 퍼지고 있습니다. 영상 속 인물은 레벨 1로 추정되며…"
'뭐? 벌써?'
인터넷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빨리 퍼진다는 게 놀라웠다.
와이파이도 끊기고 데이터도 안 터진다는 이 시국에, 소문은 광케이블보다 빨랐다.
하긴, 이런 세상에서는 자극적인 게 최고의 뉴스였다.
다들 살기 위해 정보를 갈구했고, 그 갈증에 딱 맞는 떡밥이 나였다.
레벨 1짜리가 좀비 무리를 썰어버렸다는데, 이게 안 퍼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옛날로 치면 반에서 제일 조용한 애가 갑자기 전국 수능 만점을 맞은 거랑 비슷한 충격이려나.
'……아니, 비교가 잘못됐나.'
'뭐가 됐든 일단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같다.'
생존자 무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용히 다니자. 눈에 띄지 말고.'
발소리마저 죽이며 걸었다.
그런데 골목을 돌자마자, 나는 딱 멈춰섰다.
골목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큰 키에 험상궂은 인상, 팔에는 문신처럼 보이는 상처 자국까지.
딱 봐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세계관이면 저런 실루엣은 보통 보스급 몬스터거나, 아니면 조폭이거나 둘 중 하나다.
'……도망갈까.'
그런데 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라.'
"용무원 아저씨." 그녀가 낮게 불렀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확신했다.
이하늘이었다.
방과후마다 내 숙직실에 와서 조용히 책을 읽던 그 학생.
덩치는 있었어도 항상 조곤조곤 말했던, 딱 하나뿐인 나를 사람 대접해주던 아이.
숙직실 문 두드리는 소리부터 달랐던 애였다.
다른 애들은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는데, 이 애만 꼭 세 번 노크하고 "들어가도 돼요?" 물었다.
그런 애가 지금 이런 폐허 골목에서 조폭 같은 인상으로 서 있으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이 났다.
"이하늘… 살아있었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목이 살짝 멘 것 같았다.
"당연하죠. 저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투는 여전했다.
예의는 바른데, 은근히 세다.
5년 전에도 그랬다.
숫기 없는 척하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애였다.
"근데 아저씨, 어제 갑자기 사라졌었잖아요. 어디 갔었어요?" 이하늘이 물었다.
'……아, 여긴 하루밖에 안 지났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세계에서는 5년이 흘렀는데, 여기서는 아직 하루도 안 지났다니.
이거 무슨 타임리프물 설정도 아니고,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어, 그게, 좀 멀리 출장을…" 나는 대충 말을 흐렸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어색한 걸 느꼈다.
"거짓말이 너무 어설퍼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서로 알았으니까.
주변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 둘 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꺾였다.
이런 데서 긴 사연 늘어놓을 여유는 없었다.
"옥상에서 그거, 아저씨였죠." 이하늘이 말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나는 시치미를 떼려 했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게 느껴졌다.
전형적인 거짓말할 때 나오는 신체 반응이었다.
"저 위에서 다 봤어요. 스마트폰 든 사람이 저였어요." 그녀가 폭탄을 던졌다.
'……어, 그럼 그 촬영자가 이 애였다고?'
머릿속에서 퍼즐이 순식간에 맞춰졌다.
그러니까 아까 옥상에서 좀비 열댓 마리를 정리할 때, 반대편 건물 창문에서 렌즈가 반짝였던 게 이 녀석이었단 거다.
세상 참 좁다.
멸망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얽히는 인연이 있다니.
"저 근처 아파트에서 살아요. 위에서 아저씨 싸우는 거 보고 놀라서 찍었죠." 이하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올렸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장이 살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만약 저 영상이 올라갔다면 얼굴까지 다 팔린 거였다.
"아뇨, 제 거는 안 올렸어요. 근데 다른 사람도 찍고 있었더라고요, 건물 반대편에서."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세상에 카메라 든 사람이 나 하나만 있을 리가 없지.
이런 대참사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인류의 본능이란 참 대단하다.
어차피 퍼질 소문은 퍼졌다는 뜻이었다.
하나만 위로가 되는 건, 적어도 이하늘이 나를 팔 생각은 없었다는 거였다.
그거 하나로도 이 재회는 값어치가 있었다.
"아저씨, 그 힘 뭐예요? 진짜 대단하던데." 이하늘이 눈을 반짝였다.
순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5년간 이세계에서 마왕을 잡고 왔다는 얘기를 지금 여기서 해도 되는 건가.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믿어준다 쳐도, 그다음엔 뭐라고 설명하지. 레벨이니 스탯이니 하는 시스템 창까지 다 보여줘야 하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대충 넘기자.'
"운동을 좀 열심히 했더니." 나는 최선의 거짓말을 시전했다.
스스로 듣기에도 참 부실한 변명이었다.
"검으로 좀비 목을 자르는 운동이요?" 이하늘이 되물었다.
'……맞다, 검도 봤겠구나.'
'그럼 그 순간 나는 헬스장이 아니라 검술 도장을 다닌 거로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 이 애 앞에서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지.'
"그건, 어, 아까 주운 거야." 나는 계속 말을 지어냈다.
말할수록 스스로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반짝이는 검을 어디서 주워요."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봤다.
대답할 말이 궁해졌다.
편의점도 아니고 길바닥에 명검이 떨어져 있을 리가.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 나중에 얘기해줄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요, 나중에 꼭 얘기해줘요." 이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순히 넘어갔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 애는 캐물을 때와 넘겨줄 때를 정확히 아는 애였다.
학교 다닐 때도 성적표 얘기는 절대 안 물어봤으면서, 급식실에서 몰래 빵 숨겨온 건 기가 막히게 눈치챘던 애였다.
"근데 지금 갈 곳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딱히… 갈 곳까지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레벨 1짜리 아저씨한테 안전가옥 같은 게 있을 리가.
"저희 집 근처에 안전한 곳 있어요. 같이 가요." 이하늘이 제안했다.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고, 이 애는 위기 상황에서도 겁먹지 않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이 세상에서 저런 담대한 눈빛을 가진 사람 자체가 귀했다.
"그래, 부탁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부서진 유리 조각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나란히 걷는 게 어쩐지 익숙했다.
5년 전, 아니 정확히는 하루 전, 하교 시간에 같이 정문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는 이런 폐허가 아니었는데.
그런데 몇 걸음 못 가서, 이하늘이 걸음을 멈췄다.
"아저씨, 저기 좀 봐요." 그녀가 낮게 말하며 골목 끝을 가리켰다.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골목 끝, 좀비들과는 다른 실루엣이 서 있었다.
정장 차림.
좀비라면 절대 못 입을 옷이었다.
옷깃까지 단정하게 잡혀 있는, 이 난리 속에서 세탁소라도 다녀온 듯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든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망원경이었다.
'……저건 뭐야. 좀비 사냥꾼도 아니고.'
망원경을 들고 정장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이라니, 이건 무슨 조류 관찰 동호회에서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게 흔한 생존자 같지도 않고.'
망원경 너머로, 그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는 걸 느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이건 좀비를 피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저놈, 뭘 보고 있는 거지.'
'설마 나를?'
이하늘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슬며시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왠지 저거… 좀 위험한 느낌인데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