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2년 무예, 곰으로 환생

1화

지리산 어느 계곡, 낡은 토굴 안이었다. 강철심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흔둘. 평생을 산에서 보냈다. 젊어서는 주먹으로, 늙어서는 이론으로 싸웠다. 그래도 끝내 닿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극한의 강함. 그 말을 되씹으며 눈을 감았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런데도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이 정도면 됐다. 젊을 때는 하루 열여섯 시간을 굴렸다. 관절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비 오는 날에도 바위를 걷어찼고, 눈 쌓인 겨울에도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중년에는 이론을 쌓았다. 역학, 해부학, 심지어 물리학까지 들여다봤다. 서책을 붙잡고 밤을 새운 날이 셀 수 없었다. 노년에는 그걸 다시 몸에 새겼다. 결국 몸이 먼저 무너졌다. 무릎이 먼저 갔다. 그다음엔 허리. 마지막엔 심장이었다. 억울하지 않냐고 누가 물으면. 억울하다고 답했을 것이다. 서른 즈음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우스웠다. 뭘 더 바라나. 한 세월 동안 남에게 굽힌 적이 없었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사문의 어른 앞에서도 할 말은 했다. 그 대가로 문파에서 쫓겨났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혼자 걷는 길이었다. 혼자였기에 자유로웠다. 마지막 숨이 턱까지 올라왔다. 강철심은 눈을 떴다.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낡은 서까래, 그 위에 매달린 마른 약초 다발. 그리고 다시 감았다.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엔 반드시.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이상했다. 천장이 없었다. 대신 나무뿌리가 얼기설기 엉킨 흙벽이 보였다. 시야가 낮았다. 너무 낮았다. 색이 이상했다. 온통 흐릿한 회갈색이었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뭐야, 이거. 몸을 움직여보려 했다.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팔이 아니었다. 짧고 뭉툭한 무언가가 바닥을 헛짚었다. 버둥. 몸이 옆으로 굴렀다. 말랑한 무언가에 얼굴이 부딪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털이었다. 뭔 개소리야. 고개를 들어보려 했다. 목이 뻣뻣했다. 아니, 목이라기보다 온몸이 뻣뻣했다. 힘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몸이었다. 근육이랄 게 아예 없는 느낌이었다. 칠십 평생 단련한 몸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다고? 강철심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패닉에 빠지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산에서 배운 첫 번째 원칙이었다. 하나, 나는 죽었다. 둘, 지금 뭔가의 몸속에 있다. 셋, 그 몸은 인간이 아니다.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 환생. 와, 이거 실화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낮고 짧은 울음소리가 났다. 끼잉. 스스로 낸 소리에 놀랐다. 이게 지금 내 목소리라고? 한 번 더 소리를 내보려 했다. 끼잉, 끼이잉. 목젖이 아니라 몸 전체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성대의 구조 자체가 달랐다. 다시 눈앞의 감촉을 살폈다. 검은 털, 그 사이로 반달 모양의 흰 무늬가 어렴풋이 보였다. 코를 킁킁거려보니 젖내와 흙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곰. 그것도 새끼 곰. 강철심은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칠십 평생 무예를 닦은 인간이 곰 새끼로 태어났다.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전설에도 없는 얘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런데 몸은 분명히 존재했다. 숨을 쉬는 감각, 심장이 뛰는 감각, 배가 고픈 감각까지. 모든 게 생생했다. 발끝의 조그만 발톱까지 하나하나 느껴졌다. 좋다. 받아들이자. 마음을 정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미련이랄 게 없었다. 죽기 전에 이미 다 내려놓은 몸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죽었으면 그걸로 됐다. 이번엔 다른 걸 해봐도 나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 극한의 강함이라는 것, 이번에는 반드시. 칠십 년을 바쳤는데도 못 닿은 벽이었다. 그 벽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곰의 몸으로라도, 어떻게든 그 끝을 보고 싶었다. 그 순간 옆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움직였다. 스윽. 거대한 그림자가 새끼 곰들 위로 드리워졌다. 짙은 사향 냄새, 뜨거운 숨결. 어미였다. 강철심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어미의 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반응하는 육체. 이거 곤란하네. 머리로는 경계하는데 몸은 벌써 안겨 있었다. 이 몸뚱이는 아직 갓난것이었다. 본능이 이성보다 앞서는 게 당연했다. 어미 곰의 커다란 눈이 새끼들을 하나씩 훑었다. 콧등이 젖어 반짝였다. 그 시선이 강철심의 몸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뭘 보는 거야. 어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는 짐승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한 무언가가 있었다. 의아함. 강철심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대신 가만히 마주 보았다. 인간이었을 때도 눈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다. 산에서 만난 온갖 짐승들과도 그렇게 눈을 마주했다. 호랑이든 늑대든 물러선 적이 없었다. 짐승의 눈을 상대로도 그 습관은 남아 있었다. 어미 곰의 코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언가 낯선 것을 감지한 듯한 떨림이었다. 이 새끼, 뭔가 다르다는 걸 벌써 눈치챈 건가. 짐승의 감각은 인간보다 예민하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강철심은 속으로 웃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이지만, 머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일단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목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어렴풋이 다른 형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것들. 형제들인가. 숫자를 세보려 했지만 시야가 흐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둘, 아니면 셋. 어미 곰이 낮게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새끼의 몸을 앞발로 끌어당겼다. 발바닥이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그 커다란 몸집에 비해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따뜻했다.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온기. 하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뭔가를 의심하는 듯한, 낯선 것을 마주한 어미의 눈. 강철심은 그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이 짐승이 사람 냄새를 맡은 건가, 아니면 그냥 감이 이상한 건가.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어미는 그저 짐승이었고, 강철심은 그 짐승의 배 속에서 나온 새끼였다. 말이 통할 방법이 없었다. 앞으로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몸으로도, 반드시 그 끝을 보고 만다. 어미 곰의 앞발이 강철심의 등을 슬며시 눌렀다. 그 무게에 눌려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그 순간, 어미의 낮은 울음소리가 토굴 안을 채웠다. 크르르릉. 다른 새끼들이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강철심의 몸도 함께 떨렸다. 의지와 상관없는 반응이었다. 이 울음, 뭔가 신호 같은데. 토굴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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