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봄이 깊어지자 굴 밖 출입이 잦아졌다.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날이었다.
굴 안에서부터 이미 냄새가 달랐다.
눅눅한 흙냄새 대신, 비 그친 뒤의 풀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강철심은 그 냄새만으로도 알았다.
이제 나갈 때가 됐구나.
어미가 앞장서 걸었다.
산이와 다른 두 새끼가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강철심도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아직 힘이 덜 붙었는지, 걸음이 뒤뚱거렸다.
굴 입구를 나서는 순간, 빛이 눈을 찔렀다.
강철심은 잠시 눈을 찡그렸다.
초록. 온통 초록이었다.
젖은 흙냄새, 이끼 냄새,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
지리산이구나.
낯익은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죽기 전까지 걷던 능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갑다면 반가운 거고.
새끼들은 저마다 코를 킁킁대며 주변을 살폈다.
산이는 어미 다리 사이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눈만 굴렸다.
다른 두 새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미는 새끼들을 가까이에 붙여두었다.
산이와 다른 두 새끼는 어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강철심만 조금씩 거리를 벌리며 걸었다.
다른 데를 좀 봐야겠는데.
몇 걸음 더 나가자 시야가 확 트였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얼핏 보였다.
어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강철심은 잠시 멈춰서 어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알아봐야지.
그날은 결국 어미 손에 다시 굴로 끌려 들어갔다.
발버둥 쳐봐도 목덜미가 물리면 끝이었다.
며칠 뒤, 기회가 왔다.
어미가 사냥을 나가며 새끼들을 굴에 남겨둔 날이었다.
산이와 다른 새끼들은 굴 안에서 서로 뒤엉켜 자고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졌다.
셋 다 깊이 잠든 게 분명했다.
강철심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다.
발끝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굴 입구로 향했다.
산이의 코끝이 잠깐 움찔했지만, 다시 잠잠해졌다.
굴 밖으로 나섰다.
몸이 아직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자꾸 엉켰다.
그래도 걸었다.
협곡까지 이어지는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좋아, 여기다.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위 사이로 물살이 세차게 부딪히는 곳이었다.
물보라가 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인간이었을 때도 급류 훈련을 즐겼다.
물의 저항을 이용해 하체를 단련하는 방식이었다.
계곡 물에 발 담그고 버티기.
그거 하나로 다리 힘이 몰라보게 달라졌었지.
이걸로 시작하자.
강철심은 얕은 물가로 다가갔다.
앞발을 물속에 담갔다.
차가운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좋다, 이 정도면.
한 발, 두 발.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바닥에 닿는 자갈의 감촉이 낯설었다.
사람 발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 순간, 물살이 다리를 휘감았다.
뭐야.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이었다.
몸이 순식간에 옆으로 밀렸다.
첨벙.
온몸이 물에 잠겼다.
이런 씨.
숨이 막혔다.
네 다리를 아무리 저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근력이 너무 부족했다.
물살에 휩쓸려 몇 미터를 굴렀다.
바위에 옆구리가 부딪혔다.
다행히 얕은 바위턱에 몸이 걸렸다.
헐떡이며 물 밖으로 겨우 기어 나왔다.
미친, 죽을 뻔했네.
온몸이 젖은 채로 바위 위에 널브러졌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보았다.
물에 젖은 털에서 비린 냄새가 났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물이 뒤늦게 넘어왔다.
인간이었을 때는 이런 물살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의 몸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근육량, 골밀도, 심지어 폐활량까지 모든 게 새끼 곰의 수준이었다.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좌절이 밀려왔다.
인간의 지식이 있어도,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몸이 안 따라주면 그게 다 뭔 소용이야.
한동안 바위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젖은 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순 없지.
강철심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텼다.
다시 물가로 걸어갔다.
이번엔 급류가 아니라 잔잔한 웅덩이를 골랐다.
작게 시작하자.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앞발로 물을 저어보았다.
어색했지만, 그래도 몸이 조금씩 반응했다.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 이거.
앞발을 뻗을 때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낮은 자세에서 균형이 더 잘 잡혔다.
한 번 더 해보자.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확실했다.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짧은 앞다리 때문인가.
인간이었을 때는 팔이 길수록 유리한 기술이 많았다.
리치가 길면 그만큼 선택지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 몸은 정반대였다.
짧은 앞다리, 낮은 무게중심.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쳤다.
오래전 배웠던 유술의 원리였다.
낮은 자세에서 상대의 중심을 파고들어 넘기는 기술.
체격 차이를 이기는 방법.
힘이 아니라 구조로 이기는 방법.
이 몸, 어쩌면.
강철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좌절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 짧은 다리, 낮은 무게중심.
어쩌면 이게 최고의 무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못 했을 움직임이었다.
곰의 몸이라서 가능한 움직임.
머릿속으로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낮게 파고들어서, 무게중심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동작.
이거 조금만 더 다듬으면.
그때, 멀리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미였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어미가 새끼를 찾아 헤매는 소리였다.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 들켰다.
강철심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물에 젖은 몸으로 최대한 빨리 비탈을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미 곰이 협곡 입구에 서 있었다.
젖은 몸으로 홀로 서 있는 새끼를 발견한 어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콧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발톱이 땅을 긁는 소리가 났다.
씨발.
강철심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도망칠 곳도, 변명할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