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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검은 형체가 남자의 등에서 스멀스멀 늘어났다.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형체는 남자의 어깨선을 따라 번졌다. 사람 모양이라기보다는 사람이었던 것의 그림자 같았다.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부적 치워." 서린에게 낮게 말했다. 서린은 이미 부적 한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돌아봤다. "진심이에요? 이거 완전 나쁜 놈처럼 생겼는데." "나쁜 놈처럼 생긴 거랑 나쁜 놈인 거는 다르지." 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발밑에서 나무 바닥이 살짝 눌리는 소리가 났다. 삐걱. 낡은 상담실 바닥이 내는 소리였고, 나는 그 소리조차 신경이 쓰였다. 형체가 반응할지 몰랐으니까. 남자의 눈이 나를 향했다. 초점이 없었다. 동공이 풀린 채로 허공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나였다가 내 뒤였다가 다시 나였다가 했다. 마치 눈동자만 살아 있고 그 안의 사람은 어디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등 뒤의 형체가 먼저 반응했다. "오랜만이네, 동류." 형체가 말했다. 목소리는 남자의 성대를 빌려 나왔는데도 전혀 다른 울림이었다. 낮고,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서린의 눈이 커졌다. "동류라고 했어요, 지금?" "들었으면 됐어." 나는 대답 대신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따뜻했다. 산 사람의 체온이었다. 손바닥 아래로 미약하게 뛰는 맥박까지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형체는 다르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스칠 때마다 온도가 뚝 떨어졌다. 차갑고, 축축하고, 어딘가 젖은 흙 같은 냄새. 장마철 무덤가에서 날 법한 냄새였다. "무슨 일이야." 나는 형체에게 물었다. "이 몸 좀 빌리고 있어. 잠깐만." "왜." "내 딸을 찾아야 해서." 형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딸이 이 동네 어딘가에 있어. 근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줘." 목소리 끝이 흐려지면서 남자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나는 어깨를 붙잡아 균형을 잡아줬다. 이 상황에서도 남자의 몸이 다치지 않게 챙기는 건 내 습성이었다. 산 사람이 무너지면 다치는 건 산 사람이지 원혼이 아니니까. 서린이 부적을 다시 쥐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부적 가장자리가 살짝 구겨졌다. "저건 원혼이에요. 사람 몸에 억지로 들어간 거고요. 저거 위험해요." "위험한 거랑 나쁜 거는 다르다니까."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안 같아. 칼도 위험하지만 요리사 손에 있으면 그냥 도구야." 서린이 뭐라 더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이 안 되는 논리인데 반박할 타이밍을 놓친 얼굴이었다. 나는 형체를 향해 손짓했다. "이 사람 몸에서 나와. 얘기는 밖에서 하자." 형체가 잠시 흔들리더니, 남자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마치 검은 안개가 몸에서 벗겨지듯, 윤곽선이 먼저 허물어지고 그 안의 형체가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남자가 그대로 무너졌다. 털썩. 서린이 재빨리 남자를 받았다. 무릎을 굽혀 남자의 상체를 받쳐 안는 동작이 생각보다 빨랐다. 이런 순간엔 잔소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애였다. "살아 있어요. 그냥 기절한 거예요." 숨소리를 확인하고서 서린이 안도한 듯 짧게 내뱉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제야 어깨의 힘을 풀었다. 형체는 이제 완전히 사람 형태를 갖췄다.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마른 체형에,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있었고, 입고 있는 건 낡은 작업복 같은 형태였다. 살았을 때는 그랬을 것이다. 어느 공장이나 시장 어딘가에서 몸 쓰며 살았을 얼굴이었다. "딸 이름이 뭐야." 나는 물었다. "한미주." "몇 살이야." "스물아홉."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삼 년 전. 내가 죽던 날." 목소리가 다시 흔들렸다. 원혼들은 대개 자기가 죽은 순간을 말할 때 목소리가 제일 많이 떨렸다. 그 순간이 몸에 새겨진 마지막 기억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서린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불빛이 상담실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유독 밝게 번졌다. "한미주, 삼 년 전 사망자 가족... 검색해볼게요." "애기가 별걸 다 하네." "애기라고 부르지 말라고요!" 서린이 화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목소리는 컸지만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검색창에 이름을 넣고, 필터를 걸고, 몇 번 화면을 밀어 올렸다. 손가락이 빨랐다. 확실히 이 꼬맹이는 스마트폰 세대였다. 나 같으면 이런 걸 찾으려면 발로 뛰어야 했을 텐데, 서린은 앉은 자리에서 반 분도 안 걸려 뭔가를 찾아냈다. "찾았다. 한미주씨, 이 근처 오피스텔에 살아요." 서린이 화면을 내밀었다. 주소가 떠 있었다.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가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형체가 나를 따라오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형태가 흐트러졌다. 윤곽선이 뚝뚝 끊기면서, 마치 화면 조정이 안 되는 텔레비전처럼 위아래로 튀었다. "뭐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형체가 마치 누군가에게 붙잡힌 것처럼 뒤로 끌려갔다. 발이 없는데도 발버둥 치는 것처럼 다리 쪽 형태가 요동쳤다. "이거..." 형체가 이를 악물듯 말했다. "안 보내주려고 하는데." "누가?" 대답 대신 형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퍽, 하는 소리도 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처럼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방금 뭐였어요?" 서린이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도 몰랐다. 영혼이 강제로 어딘가로 끌려가는 건 처음 봤다. 보통은 미련이 풀리면 스스로 사라진다. 미련을 풀지 못하면 계속 떠돈다. 그중 어느 쪽에도 안 맞았다. 지금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에게 붙잡힌 거였다. 그것도 아주 강한 힘으로. 나는 손끝이 아직 차가운 걸 느꼈다. 형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여운 같은 냉기였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또 손님이었다. 이번엔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말끔했지만, 눈빛이 차가웠다. 넥타이 매듬까지 흐트러짐이 없어서 오히려 더 이질적으로 보였다. "강도윤씨." 남자가 명함을 꺼내지도 않고 이름을 불렀다. "구마원 소속, 곽윤재입니다." 서린이 표정을 굳혔다. 부적을 쥐고 있던 손이 다시 팽팽해졌다. "구마원이 여긴 왜." "선묘가 차기 당주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군요." 곽윤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의는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예의라는 형식 뒤에 다른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강도윤씨, 방금 그 원혼, 저희가 추적하던 개체입니다." "추적이라니." 나는 물었다. "무단으로 몸을 옮겨다니는 원혼입니다. 위험도가 높습니다. 봉인해야 합니다." "봉인이 아니라 딸을 찾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 "영혼의 사정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위험도만 판단합니다." 곽윤재의 말투엔 감정이 없었다. 사무적이었다. 서류를 읽는 것처럼 담백하게 사람 목숨보다 무거운 말들을 내려놓았다. "...그쪽이 그 영혼을 끌고 간 겁니까." 곽윤재가 물었다. 말줄임표가 그의 방어처럼 느껴졌다.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의심을 앞세우는 태도였다. "아니. 우리가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끌려갔어." "끌려갔다..." 곽윤재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주 잠깐, 반박할 준비를 하다가 멈추는 표정이었다. "그럼 우리 쪽 인원도 아니라는 겁니까." "뭔가 이상한데." 서린이 팔짱을 꼈다. "구마원이 추적하던 것도 아니고, 저 사람이 데려간 것도 아니면." "제3자가 있다는 거지." 나는 사탕 봉지를 뜯었다. 딱. 포장지가 뜯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셋 다 잠깐 그 소리에 시선을 줬다가 다시 각자 생각으로 돌아갔다. "딸이 어딨는지 확인해야 해. 그게 먼저야." 곽윤재가 나를 노려봤다.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제가 먼저 조사하겠습니다." "먼저 뭘 하든 상관없어. 딸을 찾는 게 목적이면 같이 가든가." 곽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서린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팔꿈치로, 제법 세게. "저 사람 안 믿을만해요. 구마원은 원래 도와주는 척하고 뒤통수 치는 애들이거든요." "알아. 근데 지금은 손이 많은 게 좋아." "손이 많으면 뭐 해요, 그 손이 우리 뒤통수 치면." "뒤통수 치면 내가 먼저 치면 되지." 서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기절한 남자를 상담실 안쪽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고, 문단속까지 한 뒤에야 우리를 따라나섰다. 그 와중에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저 남자분 정신 들면 놀랄 텐데, 메모라도 남겨야 하지 않아요?" "괜찮아, 원래 이런 일 자주 겪는 동네야." "그게 더 무섭거든요?" 밖으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서늘했다. 곽윤재는 이미 몇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군더더기 없이 곧았다. 나는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그 뒤를 따랐다. 오피스텔까지 걷는 십 분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린만 스마트폰으로 한미주에 대한 정보를 더 캐고 있었다. SNS 계정, 최근 활동, 직장. 손가락이 쉬지 않았다. "이 사람, 최근 두 달 동안 SNS 업로드가 없어요." 서린이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 "그전엔 거의 매일 올렸는데." 곽윤재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봤다.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이상한 건 나중에 정리하고, 일단 가."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이상한 정적이 우리를 맞았다. 건물 전체 불이 꺼져 있었다. 낮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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