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벽에서 손이 나왔다.
손목까지, 그다음 팔꿈치까지, 마치 물에 잠기듯 회벽을 밀고 나왔다.
나는 라면 냄비를 불에서 내리다가 그 광경을 봤다. 옆방, 402호.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그 방에서 사람 손이 내 방 쪽으로 삐져나오는 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손이 다시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직후 벽 너머에서 뭔가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억눌린 비명 같은 게 들렸다.
냄비를 내려놓을 새도 없이 국자를 쥔 채 뛰었다.
신발도 안 신었다. 발바닥에 복도 타일의 냉기가 그대로 박혔다.
"저기요!"
402호 문을 두드렸다. 잠겼다. 손잡이를 돌렸다. 안 열렸다.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여자 목소리.
"살려, 살려주세요……"
서은결. 이름은 알았다. 우편함에 붙은 이름표로. 얼굴은 세 번 봤다. 편의점에서, 계단에서, 그리고 어제 라면 한 봉지를 나눠줄 때.
그때 그녀가 웃으면서 그랬다. 대박, 이 라면 이제 편의점에도 없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구했어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발로 문을 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경첩이 뜯겨나갔다.
문짝이 안쪽으로 쓰러지면서 먼지가 확 일었다.
방 안 풍경은 이랬다.
은결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손목이 이불에 눌려 움직이지 못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몸은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 절반이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스마트폰. 화면에 빨간 원이 떠 있었다.
생방송 중이었다.
"뭐야, 넌."
남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편안했다. 마치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이.
"신고 안 받으실 거예요? 지금 팔만 명이 보고 있는데."
그 말에 실감이 났다. 이게 게임이 아니라는 것.
스마트폰 화면이 살짝 이쪽으로 돌아왔다. 채팅창 글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ㅋㅋㅋ누구야, 저 아저씨 국자 들고 뭐하냐, 신고좀, 이거 실화냐, 후원금 이모티콘들.
나는 국자를 던지듯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손 치워요, 지금."
"싫으면?"
남자가 손을 뻗었다. 은결의 목 쪽으로.
그 손이, 목을 그대로 통과했다.
피부를 뚫는 게 아니라,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은결이 숨을 못 쉬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젖 부근의 피부가 살짝 파문처럼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투과."
내 입에서 그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이능튜브에서 이름만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스트리머. 물체를 투과하는 초능력자.
썸네일에서 본 게 다였다. 벽을 뚫고 나오는 짤막한 클립, 은행 셔터를 통과해서 들어가는 영상, 그런 것들. 재미있는 신기술 취급을 받았다. 콘텐츠로.
그러니까 벽을 넘어 이 방에 들어왔고, 지금 은결의 목을 그대로 통과시켜 위협하고 있는 거였다.
"이러면 정지 안 당해요?"
어이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남자가 낄낄거렸다.
"이능튜브는 시청자 신고 없으면 안 잘려요. 근데 다들 좋아하는데 누가 신고를 해."
농담이 아니었다. 채팅창이 실시간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후원, 이모지, 웃음.
사람 목숨이 콘텐츠가 되어 있었다.
내 안 어딘가에서 뭔가가 조용히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들린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앞으로 몸을 던졌다.
남자의 손목을 노렸다. 잡을 수 있으면, 은결을 놓게 할 수 있으면.
손이 스쳤다.
허공을 잡은 것 같았다. 손목이 안개처럼 뭉개지더니 다시 형체를 되찾았다.
"이거 왜 이렇게 재밌지."
남자가 반대편 손을 내 가슴에 갖다 댔다.
그 손이, 통과했다.
심장 바로 앞을 지나가는 감각이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없었다. 마치 내 몸이 순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이 빠져나가자 숨이 턱 막혔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손바닥을 짚었다. 손목뼈가 삐걱거렸다. 국자는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뛰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예스러운 말투, 위엄이 있는 척하는 그 말투.
됐거든요, 라고 답할 여유도 없었다.
다시 손이 뻗어왔다. 이번엔 내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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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간을 좀 되짚어야 한다.
나는 강진우, 서른둘. 얼마 전까지 경찰청 산하 비밀부서에서 일했다.
부서 이름은 없었다. 그냥 다들 '거기'라고 불렀다.
내 코드네임은 '제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으니까.
영에서 일까지, 있는 걸 없는 것으로.
처음엔 자잘한 일이었다. 사고 목격자, 기밀 유출 우려가 있는 민간인, 실수로 뭔가를 본 아이. 하나씩 지웠다. 지울 때마다 알림이 떴다. 감정 없이, 사실만.
마지막 임무는 이랬다.
최반장, 본명 최강식. 내 상관이었던 사람. 그가 약물 중독 청소년을 골목에서 쏘았다.
증거로는 남을 만한 게 많았다. CCTV, 목격자, 탄피.
최반장이 나를 불렀다.
그때 그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담배 냄새가 밴 낮은 목소리. 미안하다는 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없이, 딱 한마디였다.
"지워."
한마디였다.
나는 그 목격자의 눈을 마주 보고, 방금 본 일을 지웠다. 이십 분짜리 기억이었다.
[대상자의 단기기억 20:14~20:34 구간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런 알림이 머릿속에 떴다. 내 능력이 발현될 때마다 저런 게 떴다. 감정 없이, 사실만.
지운 뒤에 그 사람이 웃었다. 뭔가 개운한 얼굴로.
자기가 뭘 잃었는지도 모른 채.
그 웃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서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사직서를 냈다.
최반장은 말리지 않았다.
"넌 어차피 여기 안 맞아."
그것뿐이었다.
짐을 챙겨 나오면서 딱 하나 챙긴 게 있었다. 낡은 국자. 신입 때 첫 급여로 산 거였다. 부서에서 유일하게 사람 냄새 나는 물건이었다.
그 국자를 지금 이 방에서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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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02호.
투과의 손이 내 목 앞까지 왔다.
숨이 안 쉬어졌다. 손이 실제로 닿은 것도 아닌데, 목이 통과될 거라는 예감만으로 이미 숨이 막혔다.
'제로.'
내 안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불렀다.
'그 이름값을 하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진짜로 영이 되고 싶은 것이냐.'
헛소리할 시간이 없었다.
손이 내 목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투과의 팔을 붙잡았다.
잡혔다.
완전히 투과 상태가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그 순간 힘이 풀렸던 건지. 그의 손목이 내 손안에 있었다.
실체였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스마트폰을 쥔 손이 흔들렸다. 화면 속 빨간 원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 이건 좀 곤란한데."
채팅창 어딘가에서 뭐야 이거, 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봤다.
십 년 넘게 안 써본 감각이 다시 깨어났다. 손끝부터 팔뚝까지, 오래 잠들어 있던 회로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 목을 조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대신 머릿속 어딘가가 뜨겁게 당겨졌다.
그리고 세상이 잠깐, 하얗게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