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 예감이 현실이 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잡무실에 처박혀 학생들 제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라는 게 딱히 머리를 쓸 필요도 없어서 오히려 잡생각이 많아지는 종류의 노동이었다. 분리세탁이 실전에서 통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 생각이 맴돌았고, 그러다 서류 뭉치를 세 번쯤 잘못 정렬했을 때, 곽태식 선생이 잡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강도윤, 지금 시간 있나"
그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1학년 견습 임무 인솔자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급성 장염이라나, 하필 이런 날 배탈이 나서... 아무튼 대타가 필요한데, 마침 오늘 임무가 거목던전 초입 채집이라 위험도가 낮으니 자네가 가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싶었는데, 사실은 위험도가 낮다는 게 오히려 서운했다. 나는 진짜 시험이 필요했으니까. 슬라임이니 약초 채집이니 하는 건 학원에서 일곱 살짜리한테 시켜도 될 법한 임무였고, 그런 걸로는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게 확인될 리 없었다. 하지만 곽태식 선생의 표정을 보니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고, 애초에 이 학원에서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지시라는 게 몇 개나 있겠나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솔 명단은 여기 있다. 총 여섯 명이고, 던전 입구에서 반경 백 미터 안쪽에서만 채집하도록 하고. 별일 없을 거다"
곽태식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명단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별일 없을 거다'라는 말이 이 학원에서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새삼 떠올렸다. 별일 없을 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별일이 생기는 게 이 바닥의 국룰 아니던가.
나는 순순히 학생들을 인솔해 거목던전 초입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봤는데, 다들 열네댓 살쯤 되는 앳된 얼굴들이었고,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참이라 옷깃에 달린 배지도 아직 반짝반짝했다. 그중 유난히 눈이 큰 남학생 하나가 나를 힐끔거리며 옆의 친구에게 뭐라 속닥거렸는데, 아마 '저 사람이 그 생활마법 선생님이야?' 같은 말이었으리라. 학원 안에서 내 평판이 어떤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잡무나 하는 잉여 인력, 딱 그 정도.
채집 임무는 던전 입구 근처에서 자생하는 약초와 광물을 모으는 게 전부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은빛이끼와 청동초, 그리고 던전 주변에서만 자라는 결정석 조각을 채집하는 임무였다. 학생들이 각자 흩어져 채집을 시작하는 사이, 나는 던전 주변을 순찰하며 위험요소를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실 이 역할이라는 게 이름만 거창하지, 실상은 애들이 던전 안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 감시하는 보모 노릇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십여 분쯤 순찰을 돌았을까, 나는 학생들 숫자를 세어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다섯이었다. 여섯이어야 하는데.
'...누가 없어졌지'
나는 재빨리 명단을 훑으며 얼굴을 대조했고, 아까 나를 힐끔거리던 그 큰 눈의 남학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그러던 중 순찰 도중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갔고, 던전 초입에서 조금 벗어난 바위 틈 사이에서 그 학생이 초록빛 슬라임 무리에 둘러싸여 있는 걸 발견했다. 저학년들이 흔히 마주치는 하급 몬스터였는데, 문제는 그 학생이 겁에 질려 마법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끝에서 파직파직 작은 스파크만 튈 뿐, 정작 필요한 화염구 하나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걸 보니 아마 첫 실전이었으리라. 나도 저 나이 때 몬스터 앞에서 오줌을 지릴 뻔한 적이 있었으니, 저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나는 소리치며 뛰어들었고, 슬라임 세 개체가 동시에 학생을 향해 몸을 튀겼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는데, 머리로 뭘 계산할 틈도 없이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가장 익숙한 마법을 걸었다.
[생활마법 '분리세탁'을 시전합니다.]
파그작!!
슬라임의 젤리 같은 몸체가 마법에 휘말려 순식간에 표면과 핵으로 분리됐고, 핵을 잃은 슬라임은 그대로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이 마치 세탁기에서 빨래와 섬유유연제 향이 분리되어 나오듯 깔끔했는데, 슬라임의 겉면 젤리는 바닥에 철퍽 떨어졌고 핵은 그 자리에서 데구르르 굴러가다 멈췄다.
나머지 두 개체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두 번째 슬라임은 반응이 조금 늦어서 핵 대신 몸체 절반만 분리됐는데, 그래도 균형을 잃고 흐물거리며 쓰러지는 걸 보니 완전히 무력화된 건 확실했고, 세 번째는 아예 정확하게 핵을 겨냥해서 파그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그 광경을 본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는데, 방금까지 겁에 질려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경외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뀌는 게 꽤나 볼 만했다.
"저... 그거 생활마법 아니에요?"
"맞다"
"그런데 어떻게 슬라임이..."
나는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도 이게 실전에서 이렇게 깔끔하게 통할 줄은 몰랐으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사실 이건 내가 시한부라서 발버둥치다가 발견한 마법인데, 원리를 따지면 대상을 표면과 심부로 강제 분리하는 세탁용 스킬이 우연히 몬스터의 핵을 저격하는 데도 먹히더라' 이런 소리를 열네 살짜리한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없으시고요?"
나는 오히려 학생을 향해 물었는데, 그제야 학생은 정신을 차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는데, 혼자 대열에서 이탈해서 죽을 뻔했다는 자각이 뒤늦게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됐다고,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몇 번 다짐을 받고서야 겨우 학생을 데리고 나머지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채집 임무를 마치고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 나는 방금의 전투를 곱씹으며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분리세탁은 대상의 표면과 핵심부를 나누는 원리이기 때문에 몬스터의 핵이나 급소를 정확히 겨냥하면 즉사에 가까운 효과를 낸다는 것. 이건 세탁기가 옷감의 섬유와 오염물을 분리하는 원리를 그대로 생물체에 적용한 셈이었는데, 슬라임처럼 핵과 젤리질 몸체가 명확히 구분되는 몬스터한테는 특히 잘 먹힐 만한 상성이었다. 둘째, 이 마법은 마력 소모가 공격마법보다 현저히 적어서, 연속 시전이 가능하다는 것. 세 마리를 연달아 처리했는데도 나는 숨 한 번 크게 몰아쉬는 정도로 끝났고, 이건 화염구 한 번 쏘고 헐떡거리는 신입 마법사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이질적인 효율이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통했다는 것이었다. 실전에서,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위기 상황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이 겹쳤는데도 마법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지난 몇 달간 공책에 끄적이던 가설들 중 하나가 드디어 검증됐다는 뜻이었고, 그게 나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었다.
학원으로 돌아오자 곽태식 선생이 보고를 받으러 왔는데, 학생이 신이 나서 슬라임 사건을 설명하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생활마법으로 슬라임을 잡았다고?"
"네, 선생님! 강 선생님이 손 한 번 휘두르니까 슬라임이 그냥 퍼억, 하고 터졌어요! 완전 멋있었어요!"
옆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그 말을 듣고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는데, 그중 몇몇은 "생활마법으로도 그게 돼요?" 하고 되묻기까지 했다. 나는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딴청을 부렸다.
곽태식 선생은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 사람도 지금 뭔가 계산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나를 이용할 계산인지 경계할 계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이 학원에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늘었다는 생각뿐일 수도 있었다. 곽태식 선생의 표정은 원래도 읽기 어려운 편이었는데,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그날 밤 나는 공책을 펴고 오늘 확인한 사실들을 추가로 적었다. '분리세탁, 슬라임 핵 저격 시 즉사 가능. 마력 소모 미미. 연속 시전 3회 무리 없음.'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꽤나 그럴듯한 전투 스킬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게 슬라임이라는, 던전에서 가장 만만한 몬스터를 상대로 한 성과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적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이유는, 이 작은 성공 하나로 뭔가 큰 게 바뀔 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이게 그저 우연한 요행일 뿐이라는 불안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슬라임은 던전에서도 가장 약한 몬스터 축에 속했고, 나는 아직 진짜 위험한 존재와는 부딪혀본 적이 없었으니까. 골렘의 핵을 정확히 저격할 수 있을까. 오크의 심장을 노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몬스터들은 핵이나 심장이 그렇게 만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을 텐데.
그렇다면, 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다음에는 더 깊은 층에서, 더 강한 상대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애매한 가설을 확신으로 바꾸려면 실전에서 몇 번은 더 검증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슬라임 몇 마리 상대로 어깨에 힘주는 걸로 끝나서는 안 됐다. 그리고 마침 학원에서는 며칠 후 저학년 정식 던전 공략 일정이 잡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번엔 채집이 아니라 실제 몬스터 소탕을 목적으로 하는 임무라는 얘기도 함께 돌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곽태식 선생을 찾아가 나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청할 작정이었다. 이번엔 슬라임 몇 마리로 끝날 임무가 아니라는 예감이, 묘하게도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러나 그 밤, 공책을 덮으며 나는 문득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이 정식 공략이라는 게, 정말로 내가 원하는 종류의 시험이 맞을까. 아니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 답을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