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일이 이렇게 될 줄, 본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느니라. 굴욕을 딛고 힘을 시험하려던 그 밤, 하늘의 균열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개벽의 조짐이란 본디 하루아침에 오는 법이 없다더니, 그 말이 참으로 옳도다.
다행히 그 균열은 몇 시간 뒤 자연 봉합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본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완전히 안전하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천지간의 기운이 한 번 뒤틀렸다 함은, 필시 또 다른 재앙의 서곡*이리라.
*서곡: 본격적인 사건에 앞서 벌어지는 작은 조짐.
일주일 뒤, 본좌는 마음을 다잡고 국가능력관리청으로 향했다. 정식으로 통행패, 그들의 표현으로는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기 위함이었다. 지원계열이라 할지라도 신분을 명확히 해두는 것이 도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명불허전*이라 하였으니, 본좌 역시 이름값에 걸맞은 신분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명불허전: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음. 명성에는 반드시 실력이 뒤따른다는 뜻.
청사는 거대한 석조 건물이었다. 본좌는 이를 '무림맹 본단'이라 명명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보고 본좌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것은 필시 결계의 일종이로다. 진법으로 문을 열고 닫는 재주라니, 참으로 신묘하도다.' 물론 그것은 그저 센서에 반응하는 문이었을 뿐이나, 본좌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을 어찌하리.
대기실은 인산인해였다. 사방에서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앉아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군웅할거*의 형국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앉아 기다리는데, 옆자리의 청년이 흥분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군웅할거: 여러 영웅이 각지에서 세력을 다투는 형세.
"야 나 이번에 검성 계열로 나왔대! S급 판정 받으면 바로 헌터협회 스카우트 들어온다더라!"
청년의 목소리는 온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본좌는 조용히 그 대화를 흘려들으며 순서를 기다렸다. 속으로는 '검성 계열이라니, 참으로 부럽도다. 본좌의 화룡점정검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팔짱을 꼈다.
번호표에 적힌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앞서 앉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렸고, 그 옆 젊은 처자는 손바닥만 한 요망한 기계, 이른바 전서구를 두드리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본좌는 그 모습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침내 창구로 안내되었다. 안경을 쓴 직원이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확인했다.
"성명, 강태민. 스킬명이…"
직원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캠프 설영? 이거 맞아요?"
"…그러하다."
직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본좌를 한 번 흘겨보았다. 본좌는 그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했다.
"등급 측정 들어가겠습니다."
직원이 태민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커다란 마법진 같은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원형의 문양은 은은한 청광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이는 필시 이 시대 나름의 태극진*이리라. 본좌는 그 위에 서서 손을 들고 스킬을 시전했다.
*태극진: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진법.
"설영."
방 한복판에 텐트가 세워졌다. 순식간에 펼쳐진 그 모습에 감독하던 직원조차 눈을 껌뻑였다. 측정 장치의 게이지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어느 지점에서 멈춰섰다. 본좌는 그 게이지가 하늘 끝까지 치솟기를 기대하며 숨을 죽였다.
『측정 결과: F등급 (비전투 지원계열)』
허공에 뜬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본좌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게이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멈추기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 미련 없이 딱 붙어 있었다.
직원이 서류에 무언가를 적더니 창구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F등급이시네요. 통행패는 발급되는데, 던전 진입 시 전투 지원 불가 태그가 붙습니다."
대기실 곳곳에서 실소가 터졌다. 근처에 앉아있던 이들이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텐트 스킬이래. 캠핑 스킬 ㅋㅋㅋ"
"그런 것도 등록해주긴 하는구나."
"우리 아빠도 텐트 잘 치시는데. 저것도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이어졌다. 본좌의 뒤통수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굴욕이었다. 천하제일의 검을 쥐었던 자가, 텐트 하나로 온 청사의 비웃음거리가 되다니. 검성이 될 운명이었던 자가 야영지기가 되었다 함은, 이 어찌 일락서산*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일락서산: 해가 서산으로 떨어짐. 세력이나 형세가 기울어 몰락함을 이르는 말.
"저기, 다음 안내 도와드릴게요."
직원이 무심하게 다음 번호를 불렀다. 본좌는 통행패를 받아들고 조용히 청사를 나섰다. 손에 쥔 그 카드 한 장이 어찌나 가볍던지, 마치 본좌의 위신마저 함께 접혀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온 순간, 전서구가 울렸다. 지은이었다.
[한지은]: 등록 잘 했어? 너무 신경 쓰지 마 F등급이라도
[한지은]: 아 미안, 그거 말 안 하는 게 나았을까
본좌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상처를 덧낼 뿐이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고 오갔다. '지은 저 아이는 어찌 이토록 본좌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인가. 참으로 지음지교*로다.' 그리 생각하니 뜨겁던 뒤통수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지음지교: 마음을 알아주는 벗과의 사귐.
[강태민]: 괜찮으니라.
짧게 답을 보내고 청사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뒤통수의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벤치 옆으로는 방금 등급을 받았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나가는 청년 무리가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붉은 색으로 큼지막하게 'S'라 적힌 카드가 들려 있었다. 본좌는 자신의 손에 쥔 흐릿한 회색 카드를 슬며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천하를 오시하던 본좌가, 이런 초라한 처지에 놓이다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본좌는 그 무심한 하늘을 노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하늘이여, 어찌 본좌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가. 필시 이는 대기만성*의 서장이리라.' 그리 자위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듯도 했다.
*대기만성: 큰 인물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
그때였다.
『긴급 알림: 강남구 일대 소규모 던전 균열 감지.』
『반경 500m 내 시민 대피 요망.』
본좌의 전서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청사 앞 사람들이 하나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사 바로 인근, 도로 한복판에서 검은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 균열 안쪽에서 붉은 눈이 번뜩이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청사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본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는… 본좌의 힘을 시험할 자리인가.'
방금 받은 회색 카드가 주머니 속에서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