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본좌는 미처 알지 못했느니라. 그 균열 앞에서 벌인 얼떨결의 시전이, 곧 무림맹, 아니 국가능력관리청의 눈길을 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화는 복(福)의 씨앗이요 복은 화(禍)의 씨앗이라 했거늘*—본좌는 그 이치를 몸으로 다시금 깨닫게 되는도다.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복이 됨.
균열 인근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졌고, 좌판을 엎어놓은 노점상의 파라솔이 바람에 날려 나뒹굴었다. 아이 하나가 엄마 손을 놓친 채 울며 뛰어다녔고, 어느 청년은 스마트폰이라는 요망한 손바닥만 한 기계를 손에 쥔 채 사진만 찍어대고 있었다. 참으로 대담한 자로다. 목숨이 오가는 이 판국에도 그 요물을 손에서 놓지 않는구나.
본좌는 사람들을 헤치고 균열 쪽으로 다가섰다. 발밑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떨어뜨린 음료 캔이었다.
"거기 위험해요! 물러나세요!"
출동한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검을 든 청년이었다. 등 뒤에 무림맹 통행패, 아니 협회 배지를 매단 것이 언뜻 보였다. 하지만 균열에서 튀어나온 것은 예상보다 컸다. 개 형상을 한 검붉은 야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대기가 흔들렸다.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지면의 흙먼지가 함께 흩날렸으니, 그 위세가 실로 산악을 무너뜨릴 듯하였다.
'이는 흡사 나락에서 기어 나온 지옥견이로다.'
본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지옥견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나, 그렇게 여기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으아악!"
한 노년의 행인이 발을 접질려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나동그라지며 배추와 파가 아스팔트 위로 쏟아졌다. 야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헌터는 반대편에서 다른 시민을 구하느라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다.
본좌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이는 필시 오랜 세월 산중에서 갈고 닦은 본좌의 신법(身法)이 무의식중에 발현된 것이리라. 본좌는 노인을 향해 뛰어들며 손을 뻗었다. 검도, 궁도, 그 무엇도 없었다. 오직 하나, 캠프 설영뿐이었다.
"설영!"
순간 노인과 본좌를 감싸며 빛이 응축됐다. 텐트가 아니었다. 그보다 큰, 반투명한 막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신규 효과 발현: 소규모 결계 형성.』
『결계 지속 시간: 30초.』
야수의 발톱이 결계에 닿는 순간, 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야수가 어리둥절한 듯 뒤로 물러섰다. 마치 문에 세게 부딪힌 강아지의 표정이었다.
'…이럴 수가.'
본좌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는 결코 하찮은 캠핑 재주가 아니었다. 결계라는 이름 그대로, 하나의 방어진(防禦陣)이었다. 지난날 텐트 하나 쳤다고 세간의 비웃음을 샀던 그 굴욕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던가. 참으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로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짐.
"괘, 괜찮으세요?"
노인이 본좌를 붙잡고 물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본좌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계 안에서 상황을 살폈다. 야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알이 붉게 충혈된 채 침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흡사 며칠을 굶은 짐승 같았다.
결계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림창이 알려주었다.
『결계 지속 시간: 10초.』
『결계 지속 시간: 5초.』
'무정하도다, 이 알림이라는 요물은.'
본좌는 노인을 먼저 결계 가장자리로 밀었다.
"뛰시오. 지금이니라."
"아, 아니 근데 저건 뭔데요? 뭔 무슨 방어막이…"
"지금은 그딴 것 물을 때가 아니외다! 뛰라 하지 않았소!"
노인이 비틀거리며 결계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야수가 다시 달려들었다. 본좌는 텐트 하나를 더 시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나라는 것도, 내공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두 번의 설영은 아직 무리였다.
그때, 어디선가 검광이 번뜩였다.
"비켜!"
헌터가 야수의 옆구리를 베며 뛰어들었다. 야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결계는 그 사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미련 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에 본좌는 묘한 서운함마저 느꼈다.
"거기, 괜찮으세요?"
헌터가 숨을 몰아쉬며 본좌를 돌아보았다. 검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가 지면을 적셨다. 본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라. 그대의 검법이 실로 예리하였도다."
"…예? 아, 예에. 감사합니다."
헌터는 이상한 표정으로 본좌를 훑어보다가, 다시 야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야수는 몸통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뒤로 물러났다가, 이내 균열 속으로 슬며시 몸을 숨겼다. 마치 패장(敗將)이 아군의 진영으로 도주하는 형국이었다.
그 순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관리청 소속 인원 몇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야수도, 헌터도 아닌, 본좌를 향해 있었다.
본좌의 뒤통수가 이상하게 서늘해졌다. 이것이 필시 세간에서 말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 느낌이렷다.
"저기요, 방금 그 방어막… 본인이 시전한 겁니까?"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가 물었다. 손에는 작은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본좌는 그것을 장부라 이름하였다.
"…그러하다."
"스킬명이 뭡니까?"
본좌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캠프 설영이라고 답하면 또다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아, 이 어찌 다시 그 굴욕의 나락으로 떨어질쏘냐. 뒷목이 뜨거워지려는 찰나, 본좌는 사내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비웃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진지한 눈빛이었다.
"캠프 설영이니라."
사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곧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F등급으로 등록된 걸로 아는데… 방금 그 결계, 재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좌의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F등급이라 함은 세간에서 가장 하찮은 것으로 취급받는 등급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재검토라니.
'이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도다.'
멀리서 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인파를 헤치고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흐트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전장에서 형제를 찾는 장수와 같았다.
"태민아!"
지은이 본좌의 팔을 붙잡으며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아니 왜 니가 거기 있어, 뛰쳐나가면 어떡해!"
"본좌는 무사하니라. 걱정 마시게."
"말투 좀! 지금 이게 말투 신경 쓸 때야?"
본좌는 대답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본좌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검은 코트의 사내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여인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매끈한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것과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본좌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본좌는 순간 숨쉬는 법조차 잊은 듯하였다.
본좌는 그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저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뒤통수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굴욕의 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산문(山門)의 문턱을 넘어서기 전, 그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발을 내딛는 자의 떨림과 같았다.
여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본좌는 그 미소가, 결코 반가움의 표시가 아님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