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생존율 1%, 버텨보겠습니다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비 온 뒤의 흙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무언가 탄 냄새. 나는 분명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과제를 미루고 라면을 끓여 먹은 다음 그대로 쓰러졌던 기억까지는 선명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침대가 아니었다. 돌바닥이었다. "뭐야." 혼잣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몸을 일으키자 등에서 서늘한 냉기가 훑고 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봤다. 회색 돌기둥이 늘어선 넓은 공간,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빛나는 선으로 새겨져 있었다. 납치인가. 장기 밀매인가. 머릿속으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몸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심장은 뛰는데 손발이 떨리지 않는다. 이것부터가 이상했다. 바닥을 짚어봤다. 차갑고 단단했다.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촉감이 선명할 리 없다. 손톱으로 돌 표면을 긁어봤다. 아팠다. 진짜 아팠다. "아, 꿈 아니네." 실없이 중얼거리고는 스스로 놀랐다.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일어서서 몇 걸음 걸어봤다.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기둥 사이로 통로가 몇 개나 뻗어 있었고, 어느 쪽이 입구인지, 출구인지 구분이 안 갔다. 벽의 문자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명멸했다. 가까이 가서 손을 대볼까 하다가 관뒀다. 뭔가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왼쪽 손목이 뜨거웠다. 소매를 걷었다. 피부 위에 은색 문양이 각인돼 있었다. 화상 같기도 하고 문신 같기도 한, 처음 보는 형태의 무늬였다. 만지자 따뜻한 진동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대상자 강신우. 각성 완료.] 목소리가 아니라 문장이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랐다. 나는 주변을 두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세 번째로 둘러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세요." [네비게이터. 이하 네비로 호칭 요망.] 대답은 사무적이었다. 억양이 없다. 사람이 아니라는 게 티가 났다. "여기 어디예요." [생존의 탑. 42층 규모의 초차원 서바이벌 시설.] "…생존의, 뭐요?" [생존의 탑. 재질문은 생략을 권장.]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화가 났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장난이면 지금 그만해도 돼요. 저 진짜 무서워하고 있거든요." [장난 아님. 참가자 강신우에게 임무를 통보함.] 목소리, 아니 문장에는 감정이랄 게 없었다. 협박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었다. 그냥 통보.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게임에서나 보던 UI 창이었다. 나는 이게 게임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임무: 30일간 생존, 종합 랭킹 100위 이내 진입.] [현재 생존 참가자: 9,214명 → 8,987명.]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위가 뒤틀렸다. "227명이 벌써..." 계산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게임 시작 이후 대략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숫자라면, 나는 이미 늦은 게 아닐까. [정정. 3시간 12분 경과. 사망자 227명.] 3시간. 겨우 3시간 만에 227명. 그럼 하루가 지나면 몇 명이 남을까. 계산하려다 그만뒀다. 알고 싶지 않았다. 네비는 내가 묻지도 않은 걸 친절하게 알려줬다. 친절이 아니라 그냥 사실 전달일 뿐이라는 걸 곧 깨달았다. 목소리에 위로 같은 건 한 톨도 없었다. "저는 대학생인데요." [알고 있음.] "평범한 대학생인데요." [알고 있음. 관련 없음.] "과제도 밀렸는데요. 교수님이 저 F 준다고 했는데요." [관련 없음. 재차 강조.] 나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게 이상했지만, 안 그러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뭘 해야 되는데요." [신체 개조가 이미 완료됨. 확인 권장.] 신체 개조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손목의 문양을 다시 봤다. 조금 전보다 색이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손목을 문질러봤다. 아프지 않았다. 그저 뜨거웠다. "개조라니. 저 동의한 적 없는데요." [동의 절차는 이미 완료됨. 무의식 계약.] "무의식 계약이 어디 있어요, 그런 게." [존재함. 참가자는 반드시 계약자임.] 말이 안 통했다.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직감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한테 화를 내는 것과 벽에 화를 내는 건 다르다. 이건 벽 쪽이었다. 일단 걷기부터 해봤다. 발끝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몇 걸음 걷다가 나도 모르게 달렸다. 그런데, 쏴아아—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속도가 정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돌기둥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어느새 시야에 새로운 통로가 들어와 있었다. 숨은 하나도 차지 않았다. 멈춰야 하는데 발이 먼저 멈췄다. 몸이 알아서 속도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이게 개조라는 건가.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았다. [현재 이동속도 측정. 최고 시속 60km.] 나는 멈춰 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건 무섭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저 이제 육상선수 해도 돼요?" [비유는 무의미함. 60km는 참가자 평균 이하.] 평균 이하. 그 세 글자가 가슴에 무겁게 박혔다. "…평균 이하라고요? 이게?" [상위 참가자 다수는 시속 100km 이상. 일부는 물리법칙을 초월.] 물리법칙을 초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여기 모여 있는 건가. 아니, 인간이긴 한 건가. "물리법칙을 초월하면 그게 사람이에요?" [참가자 정의에 인간 여부는 포함되지 않음.] 인간이 아닌 것도 참가자로 들어와 있다는 뜻인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손목의 문양을 다시 내려다봤다. 나도 이제 저 정의 안에 들어간 존재라는 게, 갑자기 실감이 났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게 평균 이하라면,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 저는 뭐부터 하면 돼요. 도망이라도 쳐야 되는 거 아니에요?" [도망 불가. 탑 외부 접근 권한 없음.] "그럼 숨어 있으면요?" [가능. 그러나 랭킹 미달 시 탈락 확정.] "탈락하면요?" [답변 거부.] 네비가 처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 침묵이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문장보다 무섭게 다가왔다. 사무적인 존재가 대답을 거부한다는 건, 그 답이 나한테 진짜로 나쁜 소식이라는 뜻이었다. 멀리서, 정말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짧게 울리고 끊겼다. 나는 그 방향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발밑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면서 확신이 들었다. 발소리였다. 크고, 무겁고, 일정한 박자로 가까워지는 발소리. "저기, 네비." [호칭 확인.] "저거 뭐예요." 대답이 없었다.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몇 초가 지금까지 겪은 어떤 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탐지 완료. 4등급 개체 접근 중. 거리 200미터.] 4등급이 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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