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생존율 1%, 버텨보겠습니다

5화

"방금 그거, 뭐였지." 장도한이 물었다. 목소리에서 여유가 걷힌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나를 가지고 놀듯 여유롭던 그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짐승도 방심을 풀면 더 위험해진다던데, 사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도 몰라요. 저도 지금 처음 알았어요."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할 정신이 있으면 좋겠네요." 정말이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방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손목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방금 쓴 힘의 반동인지 구분이 안 됐다. 네비의 정보가 머릿속에서 계속 흘렀다. [멀티태스크. 동시 인지 및 동시 행동. 등급 F. 발동 지속시간 0.3초 추정.] 0.3초. 숨 한 번 들이켜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방금 막았고, 피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몸이 두 개로 갈라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왼쪽 눈은 주먹을, 오른쪽 눈은 발끝을 따로 보고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방금 처음 알았다. "그거 한 번 더 되나?" [불명. 발동 조건 미확정.]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데 다시 쓸 수 있냐는 물음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참 정직한 시스템이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쓸데없이 희망을 주지 않는다. 지금은 그 정직함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낭떠러지 끝에서 다리에 힘을 줬다. 발밑으로 흙이 조금씩 부서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는 갈 곳이 없고 앞에는 장도한이 있었다. 양옆도 마찬가지로 절벽이었다. 이건 뭐, 사면초가도 아니고 삼면초가였다. "다시 온다." 그가 몸을 낮췄다. 방금 전과는 다른 자세였다. 무게 중심이 완전히 바뀌었다. 진심으로 상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동안은 장난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한 번. 주먹이 왔다. 시야에 그의 팔 근육이 팽창하는 게 보일 정도로 느리게, 동시에 너무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몸을 틀었다. 서걱. 소매가 갈라졌다. 살이 스치듯 베인 감각이 늦게 도착했다.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가웠다. 상처는 늘 그렇게 늦게 온다. 아프기 전에 먼저 서늘함이 온다. 두 번. 무릎이 파고들었다. 나는 팔로 겨우 방향을 틀었다. 퍽! 충격이 뼈까지 울렸다. 몸이 붕 떴다.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하늘이 발밑에, 땅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낭떠러지 바로 위였다. 나는 허공에서 손을 뻗어 바위 모서리를 붙잡았다. 손끝에서 뭔가 뜯기는 느낌이 나더니, 손바닥이 찢어지는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손가락 세 개로 겨우 매달렸다.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바로 후회했다. 바닥이 안 보였다. 안 보이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이거 진짜 죽을 수도 있겠는데." 웃음이 나왔다. 웃긴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이게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저항 같았다. 울 시간도 없는데 웃음은 왜 나오는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도한이 낭떠러지 끝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표정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나를 구할 생각도, 밀어버릴 생각도 아직은 정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살고 싶어?" "당연하죠." "그럼 뭐라도 보여줘." 그가 손을 뻗었다. 밀어버리려는 게 아니라, 확인하려는 손짓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그게 그의 관심이었다. 사람 목숨을 시험 문제 취급하는 그 태도가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화낼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 손바닥의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줬다. 아프니까 정신이 든다. 아프니까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네비." [호출 확인.] "방금 그거, 조건이 뭐였는지 진짜 몰라요?" [분석 중. 발동 직전 상태: 극도의 긴장, 시야 분할 시도, 생존 위협 임계.] 긴장, 시야 분할, 임계. 세 가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맞물렸다. 딸깍, 하고 뭔가 끼워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조건에 들어맞았다. 낭떠러지에 매달려서 손끝 하나로 버티고 있고, 눈앞엔 나를 시험하는 남자가 있다. 긴장도, 임계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장도한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뻗어왔다. 잡히면 끝이다. 붙잡히는 순간 이 손끝의 힘도 소용없어질 것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왼쪽 시야로 그의 손을, 오른쪽 시야로 낭떠러지 아래 바위 턱을 동시에 담으려 애썼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뭔가를 억지로 쪼개려는 느낌이었다. [조건 재확인 중.] […발동 실패.] "…어?" 0.3초의 기적은 두 번 연속으로 오지 않았다. 장도한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붙잡은 힘이 뼈를 으스러뜨릴 듯했다. 손목 안쪽에서 뭔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건 운이었나." 그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실망이 오히려 살의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실망한 사람 손에 죽는 것과 화난 사람 손에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쁠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도 아닌데 머리 한쪽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고. 생존 확률 5% 미만.] 네비의 경고가 뒤늦게, 그리고 냉정하게 울렸다. 참 고맙다, 5%라도 남았다는 걸 알려줘서. 아니, 이런 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면 정말 못 봐주겠다. 나는 붙잡힌 손목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각도로 팔을 꺾어봤지만 소용없었다. 힘의 차이가 너무 명확했다. 이건 뭐 어른과 아이 손목잡기도 아니고, 그냥 기둥에 매달린 것 같았다. "…한 번 더."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발동 조건이 긴장과 임계라면, 지금이야말로 최악이자 최적의 순간이었다. 손목은 부러질 듯 아프고, 발밑은 허공이고, 눈앞엔 나를 죽이려는 손이 있다. 이보다 더 절실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시야가 다시 흐려지려는 감각이 눈꺼풀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두 개의 렌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려는 것 같은, 이상하고 낯선 느낌이었다. 장도한의 다른 손이 천천히 들리고 있었다. 이번엔 확인이 아니라, 끝내려는 손짓이었다. 손가락이 곧게 펴지는 게 보였다. 저 손이 내려오면 정말로 끝이다. [조건 재확인 중…]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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