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생존율 1%, 버텨보겠습니다

2화

비명은 한 번 울리고 끊겼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이어졌으면 누군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 텐데.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속 60킬로짜리 다리를 가지고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여전했다. 개조된 건 근육이지 마음이 아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이 몸은 도망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갑자기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네비." [호출 확인.] "저 지금 어디로 가야 돼요?" [임무 수행에 최적화된 경로는 존재하지 않음. 자율 판단 요망.] "그거 그냥 모른다는 소리잖아요." [정확함.]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AI는 위로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기능이 삭제된 것 같았다. 차라리 "괜찮을 거예요" 같은 빈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목소리는 그런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힌트 주시면 안 돼요? 어느 방향이 덜 위험한지 정도는." [모든 방향의 위험도는 동일한 것으로 산정됨.] "이게 위로예요, 협박이에요?" [정보 제공임.]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정보 제공이었다. 나는 벽에서 등을 떼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걸었다. 돌기둥 사이를 따라가자 넓은 광장이 나왔다. 하늘은 없고 대신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쏟아졌다. 그 빛은 태양빛도 아니고 조명도 아닌, 어딘가 인공적이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벽면에는 이끼 같은 것이 자라 있었는데, 만져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광장 한가운데 커다란 석판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빛나는 숫자들이 흐르듯 지나갔다. [종합 랭킹 – 실시간] 1위. 백진혁. 전투력 지수 9,940. 2위. 이수현. 전투력 지수 9,510. 3위. 장도한. 전투력 지수 9,102. 숫자를 보는 순간 목이 막혔다. 저 이름들, 저 숫자들.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제 지수는 얼마예요?" [강신우. 전투력 지수 112.] 112. 나는 그 숫자를 세 번 다시 읽었다. 혹시 숫자가 잘못 표시된 게 아닐까 싶어서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9,940과 112. 이건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격차였다. 100배도 아니고 거의 90배 차이. 이 정도면 그냥 다른 종족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저기요, 이거 뭔가 오류 아니에요? 자릿수가 하나 빠진 거 아니에요?" [오류 없음. 참가자 대다수는 특수 스킬 미보유. 상위권은 예외적 강자.] "그럼 저는 예외적 약자인 거예요?" [정확한 표현임.] 굳이 정확하게 짚어줄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석판 앞에 쭈그려 앉았다. 다리가 풀렸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 게 제일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마치 뇌가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웃음으로 회피하는 것 같았다. "저 그냥 조용히 30일 숨어 있으면 안 돼요? 저 지수 112짜리 인간이 나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 매 3일마다 강제 이동 및 참가자 밀집 유도 발생.] "…강제로 만나게 만든다고요?" [정확함. 규칙 3항. 대상 지역은 무작위 축소됨.] "그럼 저는 숨을 곳도 없이 그냥 저기 9천짜리들이랑 마주쳐야 되는 거네요." [통계적으로 그럴 확률이 존재함.] 무작위로 축소되는 지역, 강제로 밀집되는 참가자들. 배틀로얄이라는 말이 그제야 몸으로 이해가 됐다. 숨어도 소용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무릎을 감싸안고 잠시 멍하니 석판을 올려다봤다. 숫자들이 계속 흘러갔다. 누군가의 순위가 바뀌었는지 4위와 5위가 자리를 바꿨다. 실시간이라는 게 이렇게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광장 저편 하늘에서 갑자기 균열 같은 게 그어졌다. 하늘이 아니라 천장인데도 그렇게 보였다. 균열은 마치 유리에 금이 가는 것처럼 뻗어나갔고, 그 틈을 따라 붉은 빛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 빛깔이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피 색깔과 비슷했다. "저건 뭔데요." [구역 붕괴 전조. 3분 후 해당 구역 소멸 예정.] "3분요?" [3분.] "그거 좀 미리 말해주면 안 돼요?" [방금 고지함.] 나는 대꾸할 힘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속 60킬로의 다리가 지금은 고맙게 느껴졌다. 아까는 원망스러웠는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달렸다. 한 번. 돌기둥을 지나쳤다. 두 번. 갈라진 통로를 골랐다. 세 번.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과광! 소리가 등을 때렸다. 발밑이 흔들렸다. 나는 넘어질 뻔한 몸을 억지로 세우고 계속 달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다리가 멈출 것 같았고, 다리가 멈추는 순간 저 빛에 삼켜질 것 같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도 이상하게 몸은 계속 움직였다. 폐가 터질 것 같은데 다리는 멀쩡하게 앞으로 나갔다. 개조된 몸이라는 걸 매번 이런 순간에 실감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벌써 바닥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을 텐데. 통로를 몇 번 꺾어 돌았는지 모르겠다. 무너지는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붉은 빛도 더 이상 등 뒤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속도를 조금 줄였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적어도 죽을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다 발걸음을 멈춘 건,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의 형상 때문이었다. 키가 크다. 압도적으로 크다. 어깨선이 문짝처럼 넓고, 셔츠 위로도 근육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가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이미 이곳의 지배자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웃었다. 웃는데 이상하게 눈은 웃지 않았다. "오, 새 얼굴이네."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어딘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이 사람은 방금까지 비명이 울린 쪽에서 왔다는 것을. 그의 손끝에서, 셔츠 소매 아래로 뭔가가 붉게 얼룩져 있는 게 보였다. 내 시선이 거기 닿는 걸 알아챈 건지, 그가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마치 자랑하듯이. "이거? 아, 신경 쓰지 마. 원래 그 색깔이었어." 거짓말이라는 게 너무 뻔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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