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강선화의 실전 수업으로 다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수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실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 서바이벌(survival)이었다.
안전장치 없이 던져놓고 살아남으라니.
강선화 그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커리큘럼을 짜는 건지.
오채영이 먼저 제안했다.
"우리 오늘 좀 놀자. 나 완전 스트레스 쌓였다."
"동의."
박태산도 바로 찬성했다.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월 남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표정이 똑같았다.
말은 안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보니 다들 한계였구나.
나도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반대할 힘조차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설아도 데려가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했다.
답장은 바로 왔다.
"갈게요."
짧은 두 글자였는데도 왠지 반가웠다.
학교 근처 유흥가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판 색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마치 이 동네 전체가 크리스마스 시즌인 줄 알았다.
다들 게이트 안에서 쌓인 긴장을 풀려는 듯 신나게 걸었다.
박태산은 걸으면서 어깨춤까지 췄다.
그 모습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설아는 낯선 풍경에 눈을 두리번거렸다.
간판을 보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보다가, 또 발밑을 보다가.
정신없이 시선이 오갔다.
하얀 머리와 하얀 피부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봤다.
힐끔, 힐끔.
마치 신기한 동물원 우리 앞에 선 것처럼 다들 걸음을 늦추고 눈을 돌렸다.
"저기 사람들이 나 이상하게 봐."
설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예뻐서 그런 거야."
오채영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설아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반신화 중이라던데, 그래도 이런 반응은 사람 같았다.
뭐랄까, 신이든 반신이든 부끄러움을 타는 건 똑같구나 싶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술집 겸 카페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간판에 별과 달 그림이 그려진, 애매하게 감성적인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다들 음료를 시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채영이 강선화 흉내를 내며 다들 웃겼다.
목소리 톤을 낮추고, 눈을 매섭게 뜨고.
"우리 반은 실전으로 배운다, 안전장치는 없다."
그 말투가 어찌나 똑같은지 순간 진짜 강선화가 나타난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채영 씨, 진짜 똑같아요."
설아까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내가 원래 성우 지망이었거든."
오채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랑인지 겸손인지 모를 그 표정이 웃겼다.
박태산은 자기 앞에 놓인 음료를 세 잔째 시켰다.
"태산아, 그거 목숨 걸고 마시는 거야?"
"스트레스는 당류로 푸는 거다."
사월 남매 중 하나가 조용히 옆에서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다.
평소엔 말이 없는데, 이럴 때만큼은 손이 제일 빨랐다.
분위기가 좋았다.
이런 순간이 있으니까 그 위험한 학원도 견딜 만한 건가 싶었다.
게이트에서 죽어라 뛰어다니고, 강선화한테 실전이라는 이름의 학대를 당하고.
그런 하루하루도 이런 순간 하나로 버텨지는 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다른 학교 배지를 단 남자애들 몇 명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겋고, 말투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이부터 이미 삐딱했다.
"어이, 거기 빨간 머리 아가씨."
오채영을 향한 말이었다.
"뭐요?"
오채영이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혼자 놀지 말고 이쪽으로 오지?"
"싫은데요."
"싫다고? 아, 참 콧대 높네."
남자가 억지로 오채영의 팔을 잡으려 했다.
오채영이 손을 뿌리쳤다.
탁, 소리가 났다.
"손 치우이소."
"어허, 사투리 쓰네. 지방에서 왔나?"
비웃는 말투였다.
주변에 있던 남자애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뭔가가 속에서 확 끓어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저희 일행이니까 그만하시죠."
내가 나섰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애써 힘을 줬다.
남자가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넌 뭔데 끼어들어?"
"저 사람 친구예요."
"친구가 뭐? 넌 빠져."
그 순간 남자의 시선이 설아에게 옮겨갔다.
"어, 저건 또 뭐야. 머리가 완전 하얗네. 염색 아니지?"
"신경 쓰지 마세요."
설아가 조용히 말했지만 남자는 이미 흥미를 느낀 눈치였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냥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어이, 하얀 머리 아가씨도 이쪽으로 와봐. 신기하게 생겼네."
남자가 설아의 손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확 쳐냈다.
"손대지 마세요."
"뭐야, 이거?"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너 지금 나한테 손댔냐?"
"먼저 손대려고 하셨잖아요."
"이 새끼가 진짜."
주변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시끄럽던 음악 소리조차 멀게 느껴졌다.
다른 남자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다섯, 여섯 명쯤 됐다.
그 숫자를 눈으로 세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태산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섰다.
어깨가 맞부딪는 느낌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사월 남매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이미 전투 준비 자세였다.
"야, 니들 뭐 하는 애들인지 알아? 우리가 어느 집안 자식인지 알아?"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집안?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다.
이런 대사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몰라도 상관없는데요."
오채영이 팔짱을 끼며 쏘아붙였다.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계집애가 진짜."
남자가 손을 들어 오채영을 향해 뻗는 순간, 나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그 손을 붙잡고 비틀었다.
"으악!"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주변 남자애들 전체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이블이 넘어지고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쨍그랑!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가 뒤섞였다.
설아가 놀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오채영은 이미 손끝에 붉은 빛을 모으고 있었다.
그 빛이 어찌나 선명한지, 주변 조명이 다 무색해질 정도였다.
"이거 진짜 싸움 되는 거야?"
박태산이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흥분과 두려움이 반씩 섞여 있었다.
대답할 틈도 없었다.
남자들 중 하나가 주먹을 날렸고, 나는 겨우 피했다.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선의로 나선 게 이렇게 커지는 건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남을 도우려다가 상황을 더 키우는 것.
이번에도 결국 나 때문인가.
"다들 조심해!"
박태산이 소리쳤다.
밖에서 또 다른 남자들이 지원을 온 것처럼 무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가게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다시 밖으로.
숫자가 점점 우리보다 많아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이럴 때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참, 씁쓸했다.
그리고 그 무리 뒤에서, 처음 오채영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낮게 웃으며 전화를 꺼내는 게 보였다.
표정이 여유로웠다.
마치 이미 승부가 결정 난 것처럼.
"형, 나야. 지금 학교 후배 놈들이랑 좀 붙었는데... 좀 와줄 수 있어?"
형이라니.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말투에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뭔가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화를 끊은 남자가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너희, 오늘 운 없는 날인 줄 알아라."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여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