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머릿속이 뒤엉켰다.
이도현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등 뒤로 스며드는 냉기가 셔츠를 뚫고 살갗까지 파고들었다.
'백서준. 서은하. 이 골목.'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다른 삶에서, 종이 위의 글자로 읽었던 이름들.
소설이었다.
제목도 떠올랐다. 「재앙 이후」. 웹소설이었다. 대재앙 이후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마도 아카데미와 특이현상대책과가 나오는.
그리고 이도현은, 그 소설을 쓴 것도,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 세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생에서, 어느 밤, 침대에 누워 그 소설을 정주행하다 잠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눈을 뜬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이도현은 이 사실을 15년 전, 대재앙이 일어난 그날에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전까지는 반쪼가리 꿈처럼, 흐릿한 데자뷔처럼 흘려보냈던 기억들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문득 스치는 장면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지명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
부모가 죽던 그 날, 붕괴한 건물 아래서, 처음으로 소설 속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먼지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인 잔해 속에서, 이도현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걸 느끼며 깨달았다.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골목, 이 장면.
〈백서준이 서은하를 처음으로 지키려 하는 그 순간〉.
원작 3권 초반부. 이도현이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장면 다음부터, 백서준은 각성하고, 서은하는 인류 최초의 우호적 마인으로서 조사 대상이 된다. 그리고 훗날 세계의 균열을 막는 존재가 된다.
이도현은 눈앞의 두 사람을 다시 훑었다.
백서준. 등이 넓고 어깨가 단단했다. 지금은 아직 고등학생, 각성 전의 몸이었다. 팔을 벌린 자세가 어설펐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은하. 몸이 반투명하게 떨렸다. 마력 폭주의 흔적이 팔목부터 어깨까지 실핏줄처럼 번져 있었다. 붉은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또렷했다.
'개입하면 안 된다.'
이도현은 이 세계에서 15년을 살아왔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원작에 손대지 않았다. 원작의 흐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면서도, 관망자로 남았다.
생계 때문이었다.
특이현상대책과는 안정적이었다. 월급이 나왔다. 동생 학비가 나왔다. 양부모의 병원비가 나왔다.
영웅 놀이를 할 여유는 없었다.
몇 번이나 되새긴 다짐이었다. 원작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도, 손을 대지 않는다. 세계를 구하는 건 백서준과 서은하의 몫이지, 조연 3급 집행관의 몫이 아니다. 그렇게 4년을 일했다. 3급 신고 지점을 열두 번, 스물세 번, 마흔한 번 밟았다. 매번 규정대로 처리했다. 규정대로 보고했다. 규정대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금, 손이 멈췄다.
인장이 사라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땀이 흥건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떨림이 두려움인지, 다른 무엇인지 이도현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이도현을 응시했다.
"죽일 거예요?"
목소리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두려움보다 피로가 더 커 보였다.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마력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안 죽여요."
백서준이 대신 대답했다. 여전히 팔을 벌린 채였다.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팔은 내려가지 않았다.
이도현은 숨을 골랐다.
'원작대로라면, 이 골목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 속 이 장면에는 특이현상대책과 요원이 등장하지 않았다. 백서준이 서은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는 장면이었다. 원작에서는 이 골목 자체가 두 문장으로 요약됐다. '백서준은 서은하를 데리고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도착한 특이현상대책과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아무것도'가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도현이 여기 있었다.
변수가 생겼다.
무전기가 지지직 울렸다.
"이도현 집행관, 상황 보고 바랍니다. 3급 신고 지점 도착 확인 후 상황이 없습니다."
이도현의 엄지가 무전기 버튼 위에서 멈췄다.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규정에 맞춰 짜인 문장을 그대로 읊는 기계 같았다.
보고를 하면, 지원팀이 온다. 지원팀이 오면, 서은하는 즉결 처리된다. 마인 판정을 받은 미성년 개체는 현장 재량으로 무력화가 가능했다. 무력화라는 말은 사살을 뜻했다.
보고를 안 하면, 은폐죄가 된다. 발각되면 자신이 처벌받는다. 최소 3년의 실직. 동생 학비는 끊긴다. 양부모의 병원비도 끊긴다.
어느 쪽이든 시간은 없었다.
이도현의 관자놀이에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가 옷깃을 적셨다.
"저기요."
백서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 방금 뭐 이상했어요. 왜 안 쐈어요?"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팔은 여전히 서은하를 감싼 채였다. 눈은 이도현의 허리춤, 마력총이 꽂힌 홀스터를 살피고 있었다.
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전기 버튼에서 손을 뗐다.
버튼을 뗀 손끝이 저릿했다. 방금 무엇을 선택했는지, 이도현 자신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둘 다 따라와."
"네?"
백서준의 눈이 커졌다. 서은하를 감싼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질문 두 번 안 받아."
이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딱딱했다. 감정을 최대한 눌러 담은 목소리였다.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서은하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다리가 풀렸다. 백서준이 그녀를 부축했다. 서은하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 백서준의 팔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두 사람의 몸이 잠깐 하나처럼 겹쳤다가, 다시 떨어졌다.
"어디로요."
백서준이 물었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곳."
이도현은 짧게 대답했다. 사실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특이현상대책과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곳. 15년 동안 원작 지식으로 알고 있던, 관측 사각지대들.
'거기까지 버틸 체력이 있을까.'
서은하의 낯빛이 창백했다. 입술 색까지 파랗게 죽어 있었다. 마력 폭주 후유증이었다. 원작에서도 이 장면 이후 서은하는 사흘을 앓아누웠다.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도현의 시야 한쪽에 낯익은 문구가 떠올랐다.
【특이현상대책과 알림. 미보고 시간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고객님의 성실한 신고 이행을 부탁드립니다.】
이도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씨발.'
문구는 3초 뒤에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하단에 작은 숫자가 붙었다. 누적 미보고 시간 04:12. 그 숫자가 초 단위로 늘어나고 있었다.
'저 숫자가 얼마나 커지면, 자동으로 본부에 통보되는지 알고 있었다.'
30분. 원작 지식이 아니라, 4년 근무하며 몸으로 익힌 규정이었다.
이도현은 골목 어귀로 눈을 돌렸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로,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규칙적이고, 무거웠다.
'지원팀인가.'
아니었다. 지원팀이라면 사이렌이 먼저 울렸을 것이다. 이 발소리는 다른 무엇이었다.
이도현의 손이 다시 마력총 손잡이 위로 미끄러졌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