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사망 처리됨.
네 글자를 다시 읽었다. 이번엔 다섯 번째였다.
여섯 번째로 읽어도 똑같았다. 글자가 바뀔 리는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사망 처리됨. 오타도 아니고,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니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게 나라는 인간의 한계인 것 같았다. 사람이 죽고도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있구나. 나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게임도 아니고, 상태창이 왜 떠."
혼잣말이 이불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뭉개져 들렸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성대가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성대라는 게 지금 나한테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눈앞에 떠 있는 창은 반투명한 유리판 같았다. 손으로 만지면 잡힐 것도 같았는데, 만져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봤다. 창을 통과했다. 그냥 통과했다. 아무 저항도 없이.
"이것 참."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그 말만 나왔다.
창을 다시 들여다보니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아까는 놀라서 미처 못 봤던 줄. 큰 글씨에 시선을 뺏겨서 그 아래 작은 활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특이사항: 재해 등록번호 KR-0726-001 / 최초 사망자]
최초 사망자.
소름이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퍼졌다. 목덜미. 물렸던 그 자리. 그 단어를 읽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손을 갖다 댔다. 상처는 없었다. 통증도 없었다. 그런데 그 감각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축축한 숨, 이빨이 파고드는 느낌. 손끝으로 몇 번을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몸에는 없는데 기억에만 새겨진 상처 같았다.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는 모른다. 유령통이라고 하나.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없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한다던데, 나는 몸 전체가 없어졌는데도 목덜미만 아팠다.
숫자 001.
번호였다. 재난에도 접수번호가 있다는 게, 웃기게도 제일 실감이 났다. 화재나 지진이 나면 뉴스에 사망자 수가 뜬다. 그 숫자들 중 하나가 나였다는 소리다. 그것도 첫 번째. 무슨 신기록이라도 세운 것처럼.
나는 이 재난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이상하게 헛웃음만 나왔다. 상금은 없나. 트로피라도 주면 좋을 텐데. 최초 사망자 특전, 뭐 그런 거.
농담을 하면서도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광장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방향도 없이, 그냥 뛰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에 신고를 하려는 듯 보였다. 경찰차 사이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늦다. 언제나처럼 늦다.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소리만 다가오고 실체는 오지 않는 것처럼.
흑수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목을 물었던 그 짐승. 붉은 눈이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몸통은 새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사람만 했다. 깃털은 새까맸고, 그 위에 뭔가 기름 같은 것이 흐르는 듯 번들거렸다. 처음엔 그냥 큰 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발끝이 새의 발이 아니었다. 발톱 대신 손가락 같은 것이 다섯 개, 사람 손을 닮은 형태로 갈라져 있었다. 그 위에 검은 발톱이 얹혀 있었다.
그 이질적인 조합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 있을 때였다면 토했을 것 같다. 지금은 위장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몸이 뒤로 움직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에 튕겼다.
탕.
소리는 아니었다. 감각이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힌 것처럼, 몸이 멈췄다가 반대로 밀려났다. 등이 저릿했다. 등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저릿하다는 감각은 있었다.
다시 시도했다.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또 튕겼다.
세 번째는 아예 몸을 던지듯 뛰어봤다. 결과는 같았다. 튕겨 나오는 순간에는 시야가 잠깐 하얗게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뭔데 이거."
주변을 살폈다. 광장의 경계, 대략 역사 입구부터 버스 정류장 라인까지. 그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몸이 되돌아왔다. 눈에 보이는 경계선 같은 건 없었다. 바닥에 페인트로 그린 줄도 아니고, 유리로 된 벽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지점부터 통과가 안 됐다.
몇 번을 더 시도했는지 모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대각선으로. 결과는 늘 같았다.
갇혔다.
갇혔다는 자각이 온몸에 퍼지자, 얼어붙었던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더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쁜 쪽으로.
죽었는데, 갇혔다.
죽었는데, 여기서 못 나간다.
죽으면 편해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죽어서도 이렇게 답답할 거면 뭘 위해 죽는 건지. 살아 있을 때도 갇혀 있다는 기분으로 살았는데, 죽어서도 갇힌 거면 이건 무슨 우주적인 농담인가 싶었다.
그때 시야 구석에서 뭔가 움직였다.
처음엔 그냥 그늘이 흔들리는 걸로 봤다. 그러나 그늘이 아니었다. 그 그늘 속에서, 형체가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두 번째 흑수리였다. 균열에서 조용히,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균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광장 한쪽 바닥에 있었다. 아까부터 있었는지 방금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공기가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검은 틈. 그 틈에서 첫 번째 놈과 똑같이 생긴 짐승이 걸어 나왔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관절이 너무 많이 접히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세 번쯤 꺾여서야 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 짐승의 시선이 향한 곳.
소은이었다. 아까 내가 감쌌던 그 아이. 넘어진 채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인파에 막혀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짐승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 저렇게 큰 게 걸어 다니는데,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그 존재가 이 세계의 화면 밖에 있는 것처럼. 나만 보이는 건가.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서 보이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어야 보이는 거라면, 저 아이는 아직 못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 짐승이 다가오는 것도, 발톱을 세우는 것도, 소은이는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소은아!"
나는 그쪽으로 몸을 던졌다.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몸을, 그냥 던졌다. 발이 바닥을 박차는 느낌은 있었다. 그런데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아무리 다리를 움직여도 풍경이 그대로였다.
흑수리가 아이를 향해 발톱을 세웠다.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발톱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저걸 막을 방법이 있을까. 소리쳐서 짐승의 주의를 끌 수 있을까. 아니면 저 짐승도 나를 못 보는 걸까.
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깨달았다.
만질 수 없다. 밀 수 없다. 소리도, 아마 들리지도 않는다.
죽었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몸이 있는데 몸이 없는 것과 같았다. 눈이 있는데 눈이 없는 것과 같았다. 나는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사람이 딱 하나 있고, 그게 나라는 것.
"안 돼."
내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울림이 생겼다. 이불을 벗은 것처럼.
그 순간, 소은이의 몸이 아주 살짝, 움찔했다.
착각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아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발이 다시 튕겼다. 이번엔 짐승과 아이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처음 겪었던 그 유리벽 같은 감각이 또 한 번 나를 밀어냈다.
발톱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