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어도 괴물은 조종하겠습니다

4화

설계됐다는 감각은, 냄새처럼 왔다. 비 냄새 같기도 하고, 흙 냄새 같기도 한 것. 이 광장 어디에도 없는 냄새. 아스팔트가 젖었을 때 나는 냄새와 비슷했는데, 여긴 비가 온 적이 없었다. 하늘은 그냥 뿌옜다. 회색이었다. 비도 안 오는데 비 냄새가 난다는 게,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걸 알아챌 정신조차 없었다. 이미 잘못된 게 너무 많아서. 시야 한쪽에 새로운 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아까보다 조금 더 컸다. [던전 시스템 - 재해 대응 프로토콜 가동] [대상: 이도현 / GHOST] [남은 개체: 흑수리 3 / 확인됨] 세 마리. 나는 두 마리를 봤다. 하나는 여자를 물었던 놈. 다른 하나는 소화기를 던진 남자를 쫓던 놈. 그럼 세 번째는. 없었다. 시야 어디에도 없었다. 광장을 한 바퀴 훑었다. 뒤집힌 차, 부서진 가판대, 쓰러진 사람들. 새 같은 형체는 안 보였다. 어디 있는 거지. 숨은 건가. 아니면 아직 안 나타난 건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보이는 위협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데, 안 보이는 위협은 그냥 등 뒤에 칼을 대고 있는 거랑 똑같았다. 그 순간 다시 생각했다. 이게 시스템이라면, 나는 규칙 안에 있는 거다. 게임이면, 규칙이 있으면, 빠져나갈 구멍도 있는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했던 RPG 게임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어려운 보스도, 패턴이 있었다. 패턴을 외우면 이겼다. 죽어도 다시 시작하면 됐다. 근데 여긴 다시 시작이 없다. 이미 한 번 죽었는데, 아직도 여기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였다. 리스폰이라기엔 뭔가 다르다. 이건 그냥, 안 끝난 거다. 소화기를 던졌던 남자가 다시 뛰어 도망쳤다. 다행히 흑수리는 그를 놓쳤다. 남자는 그대로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뒤도 안 돌아봤다. 그 판단이 맞았다. 뒤돌아보는 순간 다리가 풀리니까. 대신 광장 다른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사람 목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이었다. 무릎을 꿇은 회사원이 있었다. 정장 셔츠가 다 젖어 있었다. 땀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셔츠 색깔이 원래 하늘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얼룩덜룩했다. 노인 한 명이 그 회사원 등 뒤에 숨듯이 붙어 있었다. 손이 회사원의 재킷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놓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 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엔 소은과 어머니가 서로를 붙잡고 떨고 있었다. 소은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소은의 머리를 자기 품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 손짓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광경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거다. 지각한다고 늘 뛰기만 했지, 뭔가를 위해 멈춰 선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 발걸음을 바꾼 적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넘어진 할머니를 보고도, 지각 걱정에 그냥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나중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음날이면 또 똑같이 뛰었다. 그게 나였다. 이도현. 열여덟 해 동안 그렇게 살아온 놈. 오늘, 처음으로 그랬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죽었다. 우습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착하게 살아보려던 첫날에 죽다니. 신이 있다면 진짜 유머 감각이 이상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건."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 안쪽이 뭔가에 긁힌 것처럼 아팠는데,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뭔가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죽어서도 이렇게 발이 묶여 있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내가 정해야 했다. 누가 시켜서 남은 게 아니라, 내가 남기로 정한 거였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다리가 그대로 굳어서 아무 데도 못 갈 것 같았다. 지키고 싶다. 그 단어가 나온 순간, 뭔가 스스로도 놀랐다. 나는 평생 뭔가를 지키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각을 지키지도, 약속을 지키지도, 심지어 내 방 청소 상태도 안 지켰다. 학교 과제 마감도 항상 마지막 날 새벽에 겨우 맞췄다. 여자친구랑 만난 지 세 달째에, 백일 기념일이라고 착각하고 선물을 사 간 적도 있었다. 그런 놈이었다. 나는. 그런데 그 애매한 단어가, 지금 이 순간 제일 또렷했다. 안 지키던 놈이, 죽고 나서야 뭘 지키고 싶다는 게 웃긴데, 안 웃겼다. 진심으로 안 웃겼다. 소은. 어머니. 회사원. 노인.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이름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름을 모른다는 게 오히려 더 그런 걸지도. 얼굴만 본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 그런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이렇게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시야 안의 창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저절로 커졌다. [스킬 강제 활성 조건 충족] [감정 임계치 도달 - MP 개방] MP.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게임에서만 봤다. 실제로 겪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나포인트. 마법포인트.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내 몸 어딘가에서 뭔가가 열리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가슴 한가운데, 정확히는 심장 조금 아래쪽. 거기서 뭔가 뜨거운 게 움찔거렸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두 번, 세 번 반복되니까 착각이 아니었다. 씨앗 같은 게 심장 옆에 박혀서 뛰는 느낌. 두근, 두근. 심장 박동과는 다른 리듬으로. 숫자가 떠오르기 직전, 창이 잠깐 깜빡였다. 치직, 치직. 형광등이 꺼지기 직전처럼. 그 소리가 진짜 소리인지, 머릿속에서 나는 환청인지 구분이 안 됐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시스템이 내 신경을 직접 건드리고 있는 거라면, 소리와 환청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했다. 창 안의 글자들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가, 또 흐릿해졌다. 꼭 방송 전파가 안 잡히는 텔레비전 같았다. 어릴 때 살던 반지하 집,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도 화면이 안정되지 않던 그 낡은 텔레비전. 그리고 그 순간, 세 번째 흑수리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답이, 아주 불길한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내 등 뒤에서, 뭔가 마른 잎사귀를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바스락. 아주 작게, 딱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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