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주 안에 검제를 깨워라

1화

낡은 창고 같은 검도부실. 죽도 부딪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탁, 탁, 탁. 먼지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부실 구석을 어둡게 만들었다. 벽에는 낡은 트로피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이서준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죽도 대신 물통을 쥔 손이 유난히 가늘었다. 검도부 매니저라는 직함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잡일꾼에 가까웠다. 몸이 약해서 검을 잡을 수 없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다. 그런 것치고 눈은 멀쩡히 잘 보인다. 물통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서준은 부실 안을 둘러봤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겠지, 그런 기대는 늘 오래가지 못했다. 부실 한쪽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준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2학년 하나가 목검 하나를 들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제가 안 훔쳤다니까요. 그 부원이 소리쳤다. 주장 것만 없어졌잖아. 다른 부원이 팔짱을 끼며 되받았다. 억울하면 증거를 대.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증거가 어디 있어요, 제가 안 그랬는데. 부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박준혁이 팔짱을 풀며 다가왔다. 검도부 주장, 3학년, 지역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너 어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지. 준혁이 낮게 물었다. 그건, 그건 맞는데요. 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옆에 서 있던 부원들도 하나둘 시선을 모았다. 부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서준은 물통을 내려놓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감정의 눈. 전생의 흔적. 사람의 얼굴 위로 옅게 떠오르는 감정의 결을 읽는 능력이었다. 남들 눈에는 그냥 표정으로 보이는 것들이, 서준의 눈에는 색과 결로 갈라져 보였다. 억울함은 흐린 회색, 분노는 붉은 실금, 죄책감은 진득한 얼룩. 지금 억울해하는 저 2학년의 얼굴 위에는 아무 파문도 없었다. 새하얀 백지에 가까운 결이었다. 죄지은 놈 얼굴이 저렇게 깨끗할 리가 없지. 서준의 눈이 다시 부실 안을 훑었다. 준혁의 얼굴, 무겁고 단조로운 의심의 결. 다른 부원들 얼굴, 흥미와 불안이 섞인 얕은 파문들. 그리고 걸렸다. 창가 쪽에 서서 태연하게 물을 마시는 남자, 3학년 부원. 얼굴 위로 진득한 얼룩이 흐르고 있었다. 죄책감과 통쾌함이 뒤섞인 결이었다. 저거네. 서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선배님. 서준이 그쪽을 향해 걸었다. 뭐야. 그 3학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목검 어디 있어요. 서준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그걸 왜 알아. 상대가 코웃음을 쳤다. 어제 저놈 가방 뒤지는 거 봤다는 애가 있던데. 서준이 태연히 지어낸 말을 던졌다. 순간 3학년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시선이 자기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딱 한 번, 짧게. 걸렸다. 저기 있네요. 서준이 사물함을 턱으로 가리켰다. 뭐라는 거야, 증거도 없이. 상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열어보죠. 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물함으로 몰렸다. 준혁이 천천히 걸어가더니 사물함 손잡이를 잡았다. 야, 잠깐. 3학년이 손을 뻗었지만 준혁이 먼저 문을 열었다. 철컹. 안에서 실종된 목검이 나왔다. 부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였다. 야,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준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3학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든 물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억울했던 2학년이 그제야 뭔가 알아챈 표정으로 소리쳤다. 선배가 왜 그랬어요, 진짜. 3학년이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부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게 그를 향했다. 서준은 슬쩍 뒤로 빠졌다. 이럴 때 앞에 나서봐야 좋은 게 없었다. 억울했던 2학년이 자기 대신 나서서 화를 내는 게 그림상 더 낫다. 됐다, 이 정도면 청산은 끝났고. 물통을 다시 집어들고 서준은 벽 쪽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준혁이 3학년을 붙잡고 뭐라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부원들 몇몇은 서준을 향해 흘긋 눈길을 던졌지만, 서준은 그저 심드렁한 얼굴로 물통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안 거야. 도현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강도현. 서준의 10년지기 친구. 같은 검도부원이었고 죽도를 든 손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운 놈이었다. 찍었어. 서준이 대충 대답했다. 찍었는데 어떻게 사물함까지 아냐.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은데. 서준이 뻔뻔하게 되받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도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눈치껏 좀 살아라. 서준이 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도현은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냥 웃어넘겼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게 익숙했다. 서준은 늘 뭔가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도현은 늘 그걸 캐묻지 않았다. 그게 문제야, 그게. 서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젠가 도현이 진짜로 캐묻는 날이 오면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말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부실 정리를 도현에게 대충 떠넘긴 서준은 물통을 챙겨 부실을 나섰다. 등 뒤로 준혁의 목소리가 여전히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서준은 부실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늦은 오후,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운동장 담벼락 너머로 넓게 번져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던 서준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거기, 노을 색이 이상하게 뭉개진 자리가 있었다. 하늘 한 켠. 마치 유리에 실금이 간 것처럼, 붉은 노을 사이로 검은 균열이 아주 미세하게 비쳤다.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못 볼 정도로 작은 틈이었다. 서준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저게 벌써 보인다고? 전생의 기억이 그 틈을 향해 요란하게 반응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이건 예정보다 빠른데. 서준은 걸음을 멈춘 채 그 균열을 한참 바라봤다. 손에 쥔 물통을 꽉 움켜쥔 채로. 균열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며 존재를 드러냈다. 마치 그 너머에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듯이.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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