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주 안에 검제를 깨워라

4화

[직업 확정: 견습 약사] 서준은 한참 동안 그 문구를 바라봤다. 견습 약사라니. 웃음도 안 나왔다. 전생에서는 대연금술사였다. 물질의 근본을 다루고, 세계를 이루는 원소를 재구성하던 최상위 지위였다. 왕궁에서 불려 다니던 이름이었다. 나라 하나가 서준의 손끝에서 나온 물약 하나로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생애에 붙은 이름은 견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약사였다. 이건 뭐, 시작부터 발에 걸리는 돌이네. 서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조차 흐릿한 안개에 묻혀 사라졌다. [견습 약사] [초급 조제, 초급 감별, 하급 치유 물약 제작 가능.] 능력치를 확인한 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투 능력은 전혀 없었다. 검도, 마법도, 아무것도 붙지 않았다. 조제와 감별, 딱 그뿐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나는 그냥 약 짓는 놈인 거야? 서준은 손을 들어 눈앞에 뜬 창을 몇 번이고 다시 넘겨봤다.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혹시 숨겨진 항목이 더 있을까 싶어 손끝으로 창의 가장자리까지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칼도 없고, 마법도 없고, 그냥 약이라니. 전생에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벽이 무너지고 강이 갈라졌다. 그런데 이번 생은 시작부터 몸이 다르다. 심장이 약하고, 폐가 약하고, 뛰기만 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이 몸뚱이로는 검을 쥐어봤자 반나절도 못 버틸 게 뻔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서준의 시선이 다시 제단으로 향했다. 상자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문구가 남아 있었다. [히든 조건: 전생의 지식과 결합 시, 등급 상승 가능.] 서준의 눈이 커졌다. 결합이라고. 전생의 대연금술사 지식은 원소를 다루는 이론이었다. 약을 짓는 것도 결국 원소의 배합이었다. 물, 불, 흙, 공기. 조제라는 게 결국 그 하위 개념일 뿐이었다. 이거, 아예 못 쓸 조합은 아닌데. 서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견습 약사는 전투에서는 무력하다. 하지만 물약을 만드는 능력은, 전생의 연금술 지식을 얹으면 완전히 다른 물건이 나올 수도 있었다. 하급 치유 물약이라는 게 원래 무슨 재료로 만드는지 몰라도, 원소 결합의 비율을 조금만 틀면 등급 자체가 바뀔 거야. 전생에서 배운 원소표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걸 이 세계의 조제 체계에 대입만 하면 된다.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남들이 검을 들고 싸울 때, 나는 뒤에서 물약을 뿌리면 되는 거지. 계산이 서자 좌절이 조금씩 식었다. 어차피 몸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어. 서준은 손끝에 남은 여운을 느끼며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회백색 안개가 살짝 옅어지고, 저 멀리 흐릿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탑처럼 보이는 형체였다. 탑 꼭대기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뭐야.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상태로 저기까지 갔다가 뭐라도 튀어나오면 그대로 죽는다. 서준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공간 붕괴까지 5분.] 서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붕괴라니, 그런 안내는 미리 좀 해줘야지.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띄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 최소한 십 분 전에는. 서준은 급히 몸을 돌려 처음 들어왔던 방향을 찾았다. 다행히 발밑의 진동이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동은 미세하게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땅이 스스로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서준은 뛰기 시작했다. 몸이 금방 무거워졌다. 원래도 약한 심장이 이런 무리한 움직임을 견디기 힘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입에서 쓴맛이 났다. 눈앞이 흔들렸다. 발밑으로 뭔가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안개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돌덩이들이 굴러다녔다.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넘어질 것 같았다. 넘어지면 그대로 끝이야. 그럼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것처럼 뛰었다. 폐 속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죽으면 다 끝나는 거야. 두 번째 삶이라고 해봐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안개 속에서 균열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였다. 옅은 푸른빛이 진동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다. 서준은 마지막 힘을 짜내 원래 있던 균열의 흔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촤악. 다시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서준은 공사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떨렸다.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콘크리트 가루가 손바닥에 박혔다. 살았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났다. 이 약해빠진 몸으로 이런 짓을 계속할 순 없어. 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벽에 손을 짚어야 했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균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옅게 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데 사람을 이렇게 굴리는 거야. 하지만 방금 얻은 정보가 있었다. 견습 약사, 히든 조건, 전생의 지식과의 결합. 그 세 가지를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가 진짜 문제네. 서준은 손을 들어 눈앞에 다시 상태창을 띄웠다. 하급 치유 물약 제작 가능이라는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재료를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조제 시설이라는 게 이 세계에 존재하기는 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이럴 땐 정보가 있는 놈을 붙잡는 게 최고지. 서준의 머릿속에 도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검을 쥔 손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운 그 친구. 며칠 전 체육관에서 봤던 그 손목의 각도, 그 자세가 유독 눈에 밟혔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낼 수 없는 균형이었다. 혼자서는 안 될 거야. 결국 도현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도현이 자신의 정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준 역시 자신이 견습 약사라는 사실을, 그 앞에서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만나서 떠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서준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공사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아직도 옅게 떠 있는 균열이 등 뒤에서 조용히 빛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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