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쿵.
낙석이 등을 짓눌렀다.
숨이 턱, 막혔다.
손끝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통증만은 선명했다. 등뼈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았고, 폐 한쪽이 짜부라진 것 같았다.
'춥다.'
그 생각뿐이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도, 무섭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냥 추웠다. 동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등을 타고 스며들었고, 그 냉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지리산 어느 이름 없는 동굴이었다. 등산로도 아니고, 지도에 표시된 곳도 아니었다. 대학 산악부 시절 선배가 흘려준 소문 하나를 듣고 무작정 찾아 들어간 곳. 나는 그날 밸브가 새는 산소통 하나와 로프 한 뭉치를 들고 세 사람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대학 산악부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기 둘, 그리고 나. 십 년 넘게 같이 산을 탄 사이였다.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줬고, 누군가의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웠던 사이. 그 정도로 믿었던 사이였다.
낙석이 무너지던 순간, 로프를 쥐고 있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손이 뻗어오는 궤적을, 그 손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그리고 그 손이 완전히 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먼저 나갈게. 미안해."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다. 떨림도 없었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저 사실을 통보하는 것 같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철컹.
로프가 위로 당겨져 사라졌다. 내가 붙잡고 있던 로프 끝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꼈을 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들은 나를 두고 갈 생각으로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나를 미끼로 쓸 생각으로 들어온 거였다.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원망할 힘도 없어서 그냥 웃었던 것 같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웃음인지 신음인지 나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십 년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그것도 산에서. 그것도 낙석 밑에서. 웃기지도 않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얕아졌다. 시야 끝이 어두워졌다. 어둠이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좁혀 들어왔고, 나는 그 어둠이 완전히 나를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굴 천장을 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천장이었다.
그때, 빛이 없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언어가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뼈로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는 원한을 품고 죽는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눈도 뜰 수 없었고, 입술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의식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 원한을 삼만 년쯤 씹어 삼킬 자리가 있다. 대신 너는 두 세계를 잇는 쐐기가 되어야 한다.』
계약이라는 걸 이해할 정신도 없었다. 삼만 년이라는 숫자도, 쐐기라는 단어도, 그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나를 잡아당겼다. 위에서 아래로, 안에서 밖으로, 방향을 알 수 없는 힘이 내 존재 전체를 끌어당겼다.
몸이 늘어나고, 뒤틀리고, 비늘이 돋았다. 뼈가 재구성되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렸다. 팔이었던 부위가 날개로, 등뼈였던 부위가 척추 전체를 가로지르는 긴 뼈대로 바뀌는 감각을 나는 고통 속에서 하나하나 느꼈다. 원한을 품은 채로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멈췄어.
삼만 년 후.
나는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을 뜬 적도 없다. 나는 애초에 이 던전 심층에서 잠들지 않으니까. 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이 자리를 지켜왔을 뿐이다.
내 몸은 은청색 비늘로 덮인 거대한 용이다. 날개를 펴면 던전 한 구역 천장을 다 가릴 정도의 크기. 발톱 하나가 인간 몸통만 하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낸다. 인간들은 나를 발견한 적이 없다. 이곳까지 살아서 내려온 인간이 없었으니까.
엘렌티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니 정확히는 지구와 '겹쳐' 존재하는 이세계. 두 세계는 서로 다른 마력의 밀도를 가지고 있고, 그 밀도 차이가 방치되면 서로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한다. 그걸 막기 위해 두 세계 사이에 고정해두는 못. 그게 쐐기고, 내가 그 쐐기다. 던전은 그 못이 꽂힌 자리에 생긴 상처 같은 것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쐐기는 관찰만 한다.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삼만 년 동안 그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인간들이 이 던전 어귀에서 죽어나가는 걸 몇 번이나 지켜봤는지도 세지 않았다. 어떤 이는 첫 번째 층에서 몬스터에게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두 번째 층에서 굶어 죽었다. 어떤 이는 동료에게 버림받고 이 자리 근처에서 죽어갔다. 그 모든 죽음을 나는 지켜만 봤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원한을 씹어 삼킨다던 그 목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매일 그 낙석의 무게를 다시 느끼며 이 자리를 지켰다. 등을 짓누르던 그 무게, 로프가 빠져나가던 그 감각, 손끝에서 온기가 사라지던 순간. 삼만 년이 지나도 그 기억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지구 쪽 균열이 넓어지고 있었다.
한국. 내가 죽은 그 나라. 그곳 어딘가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걸 나는 진동으로 느낀다. 마치 못 박힌 벽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느낌. 처음에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던전이라는 형태로 지구인들이 이 상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대부분은 얕은 층에서 되돌아갔다. 몬스터 몇 마리와 싸워보고는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깊이 들어올 정도로 무모한 인간은 없었다.
오늘까지는.
쿠구구궁.
심층 벽면이 흔들렸다. 삼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벽면이었다.
'전이 트랩인가.'
나는 감각을 확장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 던전 전체에 퍼져 있는 내 감각으로 벽면 너머를 훑었다.
지구 쪽에서, 무언가가 이 심층으로 강제로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생명 신호가 동시에, 그것도 아주 거칠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위에서 물건을 던져 넣는 것처럼, 무질서하고 급작스러운 낙하였다.
생명 신호 하나하나가 공포와 혼란으로 뒤엉켜 있었다. 얕은 층에서 되돌아가던 이전의 신호들과는 달랐다. 이건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 들어온 신호였다.
나는 삼만 년 만에 처음으로, 규칙을 어길지도 모를 순간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