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쿠르릉.
포효가 어둠을 갈랐다.
놈은 심층 하급 몬스터 중에서도 흉포한 축에 속하는 '흑린멧돼지'였다. 몸통만 4미터가 넘는, 검은 비늘로 덮인 짐승. 심층 마력이 과잉된 이 층에서는 상급 몬스터급으로 몸값이 뛴 놈이었다.
콰앙.
놈이 벽을 들이받았다. 돌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
"사격!"
중령이 외쳤다.
탕탕탕.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총알은 비늘에 튕겨 나갔다. 탕, 튕, 탕, 튕. 소리마저 헛되게 울렸다.
"안 들어갑니다!"
"마력탄 장전해!"
"마력이 안 잡힌다고 했잖습니까!"
대원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놈의 앞발이 그의 다리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김민재 하사가 부상자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중령님, 이대로면 다 죽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규칙을 어길 것인가.'
삼만 년을 지킨 규칙이었다. 개입하지 않는다. 관찰만 한다. 그 규칙이 나를 쐐기로, 나아가 이 세계의 균형추로 존재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어겼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조차 모른다. 삼만 년 동안 시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 남자, 중령이라는 자가 부상자를 등지고 서서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가 내 안에서 뒤틀렸다.
두려움 없는 눈이었다. 놈의 앞발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오래전 로프를 놓고 사라진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심장이 있다면, 지금 그것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나는 손끝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실체 없는 몸에도 그런 감각이 있다는 게 우스웠다.
나는 규칙을 정확히 지키기로 했다. 대신, 아주 얇게 걸쳐서.
'직접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가호는 개입이 아니다.'
법의 빈틈. 삼만 년 동안 규칙을 곱씹으며 찾아낸 유일한 틈이었다.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사이, 개입과 방관 사이에 그 틈이 있었다.
나는 손을 대듯 무언가를 짚었다. 정확히는, 심층 마력이 얇게 남은 지반에 발톱 끝을 살짝 눌렀다.
찌릿.
땅속 깊은 곳에서 마력이 실처럼 풀려나갔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흐름이었다.
그 순간, 김민재 하사의 두 손에서 은백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어? 이거 뭐예요?!"
그녀가 놀라 소리쳤다.
마력이 갑자기 잡혔다. 스킬이 발동했다.
"치유 스킬 발동합니다! 이게 왜..."
그녀의 손이 부상자의 다리 위로 떨렸다. 빛이 스며들 때마다 부상자의 얼굴에서 고통이 씻겨나가는 게 보였다.
7번 대원의 부러진 다리가 순식간에 붙었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뚜득 났다.
"어, 어어어. 다리, 다리가..."
7번 대원이 자기 다리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부러져 있던 뼈가 멀쩡히 붙어 있었다.
동시에 중령의 검에서 희미한 은빛 서리가 번졌다. 마력이 그의 검에도 얇게 스며들었다.
"...마력이 잡힌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검날을 훑었다. 은은한 서리가 칼날을 타고 흐르는 걸 확인하는 순간, 그의 자세가 바뀌었다. 무게중심이 낮아지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놈은 갑자기 힘을 얻은 인간들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중령이 검을 그었다. 서걱. 이번에는 비늘이 갈라졌다.
검은 피가 튀었다. 놈이 포효했다. 아까와는 다른, 고통에 찬 울음이었다.
남은 대원들도 사격을 다시 시작했다. 탕탕탕. 마력이 담긴 총알은 비늘을 파고들었다. 하나, 둘, 셋. 총알이 박힐 때마다 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놈이 쓰러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웅.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을 뒤흔들며 무너졌다.
정적이 내렸다.
대원들이 서로를 붙잡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우리 살았다..."
누군가 울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7번 대원이 자기 다리로 몇 번이나 서보더니, 걸음까지 옮겨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중령이 검을 거두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가 도와줬다."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김민재 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통신도 안 되는데, 누가요? 던전 안엔 저희밖에 없었잖습니까."
중령은 대답 없이 어둠을 계속 응시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정확했다. 마치 내가 숨어 있는 방향을 직감으로 짚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삼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인간형 화신을 인간 앞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로프를 놓았던 그 손과는 다른 종류의 눈빛.
나는 인간형 화신을 불러냈다. 삼만 년 동안 거의 쓰지 않았던 형태. 검은 머리, 은빛 눈동자, 사람보다 조금 큰 키.
스르릉.
어둠 속에서 그 형체가 걸어 나갔다.
대원들이 일제히 총을 들었다.
철컥, 철컥. 총구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멈춰."
중령이 손을 들어 대원들을 제지했다.
"...중령님?"
김민재 하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그가 물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웃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 눈동자만이 도드라졌다.
"이 던전은 나를 청은룡이라 부른다."
"...용?"
김민재 하사가 놀라 입을 벌렸다.
"진짜 용이라고요? 던전 브리핑 자료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그녀가 허둥지둥 무전기를 다시 두들겨봤지만, 여전히 잡음뿐이었다.
"방금 스킬 발동시켜준 게 나다. 곰 눈썹, 고맙다는 말은 안 하나?"
나는 중령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곰..."
중령의 눈썹이 실룩였다.
"이름은 한도현이다."
"흐흐, 됐어. 곰탱이가 더 부르기 편해."
김민재 하사가 픽 웃음을 참았다.
"저는 김민재 하사입니다. 저희... 대체 어떻게 살아난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 층의 관리자다. 규칙상 개입은 안 하지만... 흠, 이건 그냥 소소한 편의 제공이었다고 해두지."
"소소한 편의요?"
김민재 하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리 뼈가 다시 붙는 게 소소한 편의라고요?"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는 거지."
한도현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규칙이라는 게 있다는 건, 당신도 뭔가의 관리 대상이라는 뜻이군."
'날카롭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삼만 년 만에 마주한 인간 중에, 이렇게 빠르게 핵심을 짚는 자는 드물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너희가 여기서 살아나가는 게 우선 아닌가?"
한도현이 무전기를 다시 확인했다. 채널을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통신은 여전히 끊겨 있다."
"위쪽에서는 뭐라던가?"
내가 물었다.
"본부 쪽 상황이 복잡하다."
그가 짧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던전 개방권을 둘러싸고 정부와 군, 그리고 몇몇 민간 기업까지 알력 다툼이 심하다. 우리 오지탐사대대는... 그 다툼 속에서 예산도 뺏기고 지원도 후순위였다. 이 탐사 자체도 무리한 강행군이었지."
김민재 하사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장비도 반쪽만 지원받고 왔어요. 마력 감지기도 구형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지상은 이미 진흙탕이군.'
이 던전 안이 아니라, 던전 밖 인간들 세상이 더 위험해 보였다.
"곰탱이, 일단 이 층에서 살아나갈 길을 찾자. 내가 안내는 해줄 수 있어. 대신..."
나는 말을 끊고 웃었다.
"대신 뭡니까."
한도현이 경계했다.
"대신 나중에 내 이야기 좀 들어줘. 이 던전, 생각보다 재밌는 사연이 있거든."
한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그 전에, 하나만 묻고 싶다."
"뭔데."
"당신, 정말로 규칙을 어긴 건가?"
나는 그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김민재 하사의 숨소리조차 멈춘 것 같았다.
삼만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내 정체를 눈치챈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