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천장의 나뭇결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빛이 방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양자뇌 동기화율 94.2퍼센트.)
머릿속에서 익숙한 수치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대한연방에서 이식받은 양자뇌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 낯선 몸 안에서 더 또렷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다섯 손가락 모두 정상적으로 반응했다.
(다행이야. 이번 몸은 신경 손상이 없어.)
손목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어깨를 움츠려 관절을 확인했다.
발가락 끝까지 감각이 고르게 살아 있었다.
매일 아침 반복하는 점검이었다.
언제 이 몸에 이상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진단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강신휘.
이 몸의 이름이었다.
강씨 저택의 둘째 아들이자, 태어날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알려진 아이.
나는 그 몸에 들어온 지 석 달째였고, 아직 누구에게도 진짜 정신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저택 사람들 눈에 나는 여전히 말이 어눌하고 손이 자주 떨리는, 그저 딱한 도련님일 뿐이었다.
그 편이 지금은 안전했다.
"신휘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슬쩍 반쯤 감았다.
문이 열리고 서연이 들어왔다.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는데, 이 저택에서 나를 돌보는 유일한 시종이었다.
서연은 쟁반을 들고 다가와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죽이에요. 어제보다 좀 더 부드럽게 끓였어요."
김이 옅게 올라오고 있었다.
곡물 냄새가 방 안에 번졌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치 연기, 세 달째인데 아직도 익숙하지 않네.)
느릿느릿 숟가락을 들었다.
일부러 손을 살짝 떨었다.
서연이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얼굴로 숟가락을 뺏어 직접 먹여주려 했다.
"제가 할게요, 도련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오늘은 혼자 하시려고요?"
나는 대답 없이 죽을 떠먹었다.
따뜻했다.
미세한 소금기와 곡물 향이 입안에 퍼졌다.
(맛은 나쁘지 않아. 이 세계 요리 수준도 생각보다 괜찮고.)
숟가락을 다시 들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나는 그 사실을 서연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을 그릇 아래로 잠깐 숨겼다.
서연은 눈치채지 못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식사가 끝나자 서연은 방을 정리하며 흥얼거렸다.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렸고, 정원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함께 섞여 들어왔다.
평온한 아침이었다.
서연은 이불을 정돈하고, 빈 그릇을 쟁반에 다시 올리고, 창턱에 쌓인 먼지를 소매로 슥 닦아냈다.
그 작은 움직임들 하나하나가 낯설고도 정겨웠다.
(이 세계에서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위로가 되는군.)
그러나 그 평온함 속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이물감을 느꼈다.
가슴 한복판, 정확히는 심장 아래쪽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또야.)
요즘 며칠 사이 반복되던 감각이었다.
마치 뜨거운 실 한 가닥이 몸속을 천천히 지나가는 듯한 느낌.
나는 손으로 가슴을 슬쩍 눌렀다.
서연이 그걸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렸다.
(이 감각의 정체를 파악해야 해. 하지만 아직은 데이터가 부족하군.)
서연은 잠시 나를 살피다가, 이내 다시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박기수가 방을 찾았다.
저택의 집사였고, 후작가의 오랜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오십 대 후반쯤 보였지만, 걸음걸이가 젊은이보다 절도가 있었다.
"도련님, 산책 나가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기수가 나를 부축해 정원으로 나섰다.
그의 손은 크고 단단했고, 부축하는 힘의 세기가 늘 정확했다.
넘어질 듯 말 듯한 순간에도 절대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그 손길에서, 오랜 세월 몸에 익은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오늘은 하늘이 참 맑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빛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구름 몇 조각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세계의 대기 조성은 지구와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파장의 빛이 섞여 있어.)
마법사들이 이 빛을 마나의 근원 중 하나로 여긴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몸에 스며든 기억의 파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박기수는 정원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부분 저택의 일상적인 소식들이었다.
후작님이 요즘 실험실에 자주 계신다는 것, 태오 도련님이 마법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
"강태오 도련님도 요즘 많이 힘드실 겁니다. 후작님께서 죽령 마법을 익히라 하셨거든요."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형이 있었지. 아직 제대로 만난 적은 없지만.)
박기수의 목소리에서 태오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낮아지는 것을 나는 눈치챘다.
단순한 존경만은 아닌, 뭔가 조심스러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산책 중, 정원 구석의 오래된 담벼락 근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발끝에서 서늘한 감각이 올라왔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박기수가 이상하게 여긴 듯 나를 돌아봤다.
"도련님?"
나는 담벼락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사이를 지나간 듯한, 삐걱거리는 듯한 이질감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담벼락의 이끼 낀 표면을 훑었다.
갈라진 돌 틈 사이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진 듯도 했다.
(잔상인가, 실재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데이터가 부족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박기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산책을 이어갔다.
(뭔가... 있었어.)
산책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지만, 나는 더 이상 하늘도 정원의 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끝의 서늘함이 사라진 뒤에도, 그 감각의 잔상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방에서 홀로 앉아 몸속의 감각을 다시 곱씹었다.
창밖의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은은한 푸른빛이 바닥에 깔렸다.
나는 그 빛을 오래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 신은 실존한다고 들었다. 혈신, 월신... 각자의 신격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고.)
이 몸에 남아 있던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나는 그 이름들을 어렴풋이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어느 신을 섬기느냐에 따라 사람이 다루는 힘의 색채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강씨 저택 사람들 중 누군가도 그중 하나를 섬기고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아직 몰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 아래에서 다시 그 실 같은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조금 더 뜨거웠다.
(이건... 단순한 신경 반응이 아니야.)
심장 박동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나는 가슴을 손으로 짚은 채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뜨거운 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몸속을 한 바퀴 돌고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눈을 떴다.
방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 뭔가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부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밤이었다.
그런데도 나뭇가지는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가, 그 가지 사이를 천천히 짚고 지나가는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손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너머, 어둠에 잠긴 정원 어딘가에서 두 개의 붉은빛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