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붉은빛이 손끝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억누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새어나왔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붉은 실선이 뻗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제어할 수 없어. 이건 마나가 아니야. 뭔가 더 근본적인 것.)
살갗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다.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자체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가는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타는 듯 뜨거웠다.
경비들은 겁먹은 얼굴로 물러섰다.
그들 중 하나는 창을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컥.
그 소리에 다들 몸을 움찔했다.
누구도 먼저 다가오지 못했다.
박기수만이 앞으로 나서며 양손을 들었다.
"모두 물러서라! 도련님을 자극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나를 향한 시선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두려움을 숨기려는 듯 그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며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벽의 차가운 감촉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복도 창문 밖, 그 얼굴 없는 형체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은 윤곽이 유리창에 어른거릴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형체가 다가올수록 붉은빛은 더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두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빛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가며 손끝을 태울 듯 일렁였다.
(저것과 이 힘이... 서로 반응하고 있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 형체를 향해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이 스쳤다.
나는 그 충동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서연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괜찮으세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그 눈물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나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숨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복도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 저택 정문 쪽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밀려들었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압도적인 무언가가 저택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쾅.
저택 대문이 강한 압력에 밀려 열렸다.
경첩이 뒤틀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일이냐."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하나에 경비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걸음마다 공기가 무겁게 눌리는 듯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남자가 복도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은백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중년의 남자.
망토 자락이 그가 걸을 때마다 소리 없이 흔들렸다.
강도윤 후작이었다.
방금 대법사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먼지가 미세하게 흩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박기수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
경비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그 존재감 앞에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강도윤 후작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손끝에서 여전히 새어나오는 붉은빛을 그는 단번에 알아본 듯했다.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흔들렸다.
"신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닥을 딛는 그의 발소리는 무겁지 않았지만, 그 무게가 공간 전체에 퍼지는 듯했다.
나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창문 밖의 형체가 순간 멈춰 섰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강도윤 후작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순간, 차가운 감각이 붉은빛을 덮었다.
마치 뜨겁게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걱.
빛의 결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실제로 소리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감각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붉은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열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강도윤 후작이 나를 부축했다.
그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그 손아귀 안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느꼈다.
"괜찮다. 이제 진정됐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다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말 한마디마다 공기가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복도 창문을 바라봤다.
그 검은 형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마치 강도윤 후작의 존재감에 밀려난 것처럼.
유리창에는 그저 텅 빈 복도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저 형체가... 저 사람 앞에서는 물러났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의식이 자꾸 흐트러졌다.
강도윤 후작은 서연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서연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끝이 바닥을 짚은 채 가늘게 떨렸다.
"후작님, 저는..."
"금화 이야기는 들었다."
강도윤 후작의 목소리에 서연이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 말에 서연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는 나를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가볍게, 마치 깃털을 드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박기수, 뒤처리는 부탁한다. 서연이라는 아이는 벌하지 마라. 사정이 있었겠지."
박기수가 고개를 숙였다.
"명 받겠습니다."
그는 짧게 대답한 뒤 경비들을 향해 손짓했다.
흩어져 있던 경비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연이 놀란 눈으로 강도윤 후작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죄책감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깊이 숙였다.
강도윤 후작은 나를 안고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는 일정했고, 그 걸음 사이로 저택의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단단한 턱선, 미간에 새겨진 옅은 주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깊은 눈빛.
그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오래전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이 사람이... 내 아버지인가.)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동경과 결핍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대한연방에서도,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압도적으로 보호받은 적이 없었다.
그 감각이 낯설어서,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거라."
강도윤 후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눈이 감겼다.
그의 품에서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게감 없는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나는 그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혈왕의 기운이라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완전히 잠들어 버렸으니까.
그러나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동요가 있었다.
평소의 단정하고 낮은 어조와는 다른,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 떨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그날 밤 끝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