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분의 일 고룡, 내 사역마

2화

울프 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태룡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봤다. “어이, 마스터라며.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계약을 건 건 너잖아.” “제가 원해서 건 게 아니라니까요!” 억울했지만 강태룡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펼쳤다 오므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놈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울프 떼의 절반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정작 강태룡 본인은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밖에 안 나오는군.” 낮게 뇌까린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원래라면 저런 것들은 숨 한 번으로 재가 됐을 텐데.” 허세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강태룡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목덜미의 붉은 인장이 빛날 때마다 주변의 마나가 모였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박준혁의 고함이 터졌다. “이서하! 움직이지 마!” 철컥. 무기를 고쳐 쥐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돌아보자 박준혁을 비롯한 파티원들이 나와 강태룡을 향해 창과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강태룡보다 내 쪽을 경계하는 시선이 더 많았다. “저 괴물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아무것도 안 시켰어요!” “그럼 당장 계약부터 풀어!” 그게 마음대로 풀렸으면 나도 진작 풀었겠지. 나는 손목에 새겨진 인장을 내려다봤다. 문양은 처음부터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희미한 금빛을 흘리고 있었다. 지우려고 문질러 봤지만 사라질 기색은 없었다. 파티원들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3년 동안 스킬 하나 없던 짐꾼. 그런 내가 갑자기 미확인 초월 존재와 계약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의심을 해명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르르르르— 앞쪽에서 수백 마리의 울프가 일제히 몸을 낮췄다. 방금 전 강태룡의 힘에 눌려 있던 놈들이 다시 사냥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닥을 긁는 발톱 소리가 하나둘 겹쳐지더니, 곧 던전 전체를 긁어대는 듯한 소음으로 변했다. 수백 개의 붉은 눈이 강태룡에게 향했다. 그중 몇몇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목의 계약 인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것들이 왜 저를 봐요?” “계약 냄새를 맡은 거겠지.” 강태룡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강한 존재와 연결된 약한 쪽부터 끊으려는 거다. 짐승치고는 제법 영리하군.” “그 말을 왜 그렇게 남 이야기처럼 해요?” “내가 약한 쪽은 아니니까.” 틀린 말은 아니어서 더 열받았다. 선두의 울프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강태룡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대신 나를 포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뒤에서는 파티원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이서하, 마지막 경고야.” 박준혁이 창끝을 내 쪽으로 겨눴다. “그 괴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아니면 둘 다 적으로 간주하겠다.” “통제라니, 방법도 모르는데…….” 내가 한 발 물러서자 울프들이 동시에 앞발을 내디뎠다. 파티원들의 무기도 따라 움직였다. 뒤에는 나를 의심하는 인간들. 앞에는 나를 먼저 물어뜯으려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힘이 제한된 채 내 명령을 기다리는 화룡이 서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강태룡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빛의 세로 동공이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얼굴에 남아 있던 당혹감과 짜증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냥감을 마주한 포식자의 차가운 기색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계약이 제대로 성립한 거라면 네 의지는 나에게 전달될 거다.” “제 의지가요?” “말로 해도 되고, 머릿속으로 떠올려도 되겠지. 시험해 보지 않았으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면 어떡해요?” “계약을 당한 건 나도 처음이다.” 강태룡이 울프 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목덜미의 붉은 문양이 다시 빛났다. 그의 손끝으로 마나가 모였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말로 힘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울프들은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수백 마리의 짐승이 강태룡 한 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금빛 눈동자만 내게 돌렸다. “결정해라.” “뭘요?” “누구를 적으로 삼을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박준혁의 창끝이 내 등 뒤에서 번뜩였다. 바로 앞에서는 선두의 울프가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끈적한 침이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 네 사용마라며.” 강태룡이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정해라, 마스터.” 선두의 울프가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파티원들의 발걸음도 움직였다. 강태룡의 목덜미와 내 손목에서 계약 인장이 같은 빛을 뿜어냈다. “저것들이 네게 닿기 전에.” 이제 내가 명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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