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분의 일 고룡, 내 사역마

4화

몸을 좀 풀어보겠다고 한 강태룡의 말이 무색하게, 울프 떼는 순식간에 정리됐다. 쾅! 콰직! 퍽! 소리만 들어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니 더 이상했다. 강태룡은 그냥 걸어 다니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 손짓 한 번에 울프 세 마리씩 날아갔다. 퍼퍼퍽! 한 마리는 벽에 처박혀서 그대로 실루엣을 남겼다. 무슨 애니메이션 개그 장면처럼 벽에 울프 모양 자국이 움푹 파였는데, 저게 실제로 가능한 물리 현상인가 싶었다. 아니, 물리 현상이라기보다는 그냥 강태룡이 물리 법칙을 씹어 먹고 있는 거였다. “이야, 이거 재밌네.” 그가 중얼거리며 다음 울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근데 힘이 너무 안 나와. 이거 몸이 종이인형이 된 기분이야.” 종이인형이라기엔 지금 저 위력이면 인간 세상 기준으로는 재앙급이었다. 저게 종이인형이면 나는 뭐, 먼지 인형인가. 하지만 강태룡의 표현을 빌리면, 이건 그의 실력의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거다. 천분의 일이 이 정도면 원래 실력은 대체 뭔데. 국가 하나를 지도에서 지우는 수준인가. 울프들은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못 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치려다가 실패했다. 몇 마리는 뒷걸음질 치다가 강태룡의 시선만으로 그대로 얼어붙었고, 나머지는 발악하듯 달려들다가 허공에서 그의 손짓 한 번에 궤도가 꺾이며 날아갔다. 마치 배드민턴 셔틀콕을 치는 것 같았는데, 그 셔틀콕이 사람 몸통만 한 늑대라는 게 문제였다. 마지막 울프가 벽에 처박히고 나서야 6층이 조용해졌다. “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섭기도 하고, 안도되기도 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방금까지 죽을 뻔했다가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보디가드가 생긴 기분이랄까. 그런데 그 보디가드가 사람이 아니라 화룡이라는 게 함정이었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낚은 게 아니라 낚인 것 같은데. 계약이 강제로 걸린 거잖아, 이거. 누가 나한테 리워야단을 잡을 낚싯대라도 쥐여준 게 아니었다. 낚싯대가 알아서 리워야단을 낚아다가 내 손에 던져놓은 상황이었다. 이게 축복인지 재앙인지 판단이 안 됐다. 강태룡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2미터가 넘는 그가 다가오니 그 그림자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발소리마저 이상하게 무게감이 있었다. 던전 바닥이 그 발자국 아래에서 살짝 눌리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어이, 마스터. 이제 설명 좀 해봐.” “네?” “내가 왜 여기 있고, 네가 왜 내 마스터인지.” 나도 모른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한 대답 같아서 참았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저도 몰라요’라고 하면 저 2미터짜리 화룡이 순순히 ‘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저도 잘 몰라요. 저는 그냥 3년 동안 발동 안 되는 스킬을 갖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타나니까 갑자기 발동했어요.” 강태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 하나에 얼굴 근육이 전부 따라 움직이는 게, 진짜 사람이 아니라 뭔가 정교하게 조각된 마스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킬 이름이 뭐였는데?” “거대 벽의 인도자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강태룡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스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세요?” “아니, 확실하진 않아. 그냥 뭔가 익숙한 느낌이야.” 익숙한 느낌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나는 지금 확실한 정보가 필요한데, 저 사람은 계속 ‘느낌’이라는 말로 때우고 있었다. 마치 헬스장에서 처음 만난 트레이너가 ‘이 운동 몸에 좋아요. 느낌이 그래요’ 하는 식이었다. 그 순간 그의 주머니 부근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 사부님. 사부님, 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뭐지, 저 목소리는? 사람 목소리도 아니고, 기계 목소리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애매한 음성이었다. 마치 AI 스피커가 갑자기 감정을 탑재한 것 같은 소리였다. 강태룡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구체였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안에서는 은은한 황금빛이 돌았다. “아, 맞다. 너도 같이 넘어왔지.” “당연하죠,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마도 인공물이니까요. 설마 저를 두고 가시려고 하셨습니까? 그건 좀 서운한데요.” 구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둥실둥실. 마치 무중력 상태의 비눗방울 같았는데, 안에서 도는 황금빛이 꼭 라바 램프 같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황룡이라고 합니다. 자율 마법 인공물이며, 사부님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아티팩트라는 게 이런 거구나. 말투는 예의 바르고, 목소리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중립적인 톤이었다. 어디 콜센터 상담원 교육이라도 받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상담 만족도 조사를 하면 별 다섯 개를 받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저, 이서하예요.” 내가 얼떨결에 인사했다. 구체한테 인사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예의는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새로운 마스터시죠. 계약 인장을 확인했습니다.” 황룡이 공중에서 몇 갈래의 빛을 뿜어냈다. 마치 스캔하는 것 같았다. 슈욱,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내 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무슨 마트 계산대에서 바코드가 찍히는 기분이었다. 삐빅. “분석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서하 님은 신화급 UR 등급 테이머 스킬 ‘거대 벽의 인도자’의 보유자이며, 방금 이 계약으로 처음 스킬이 활성화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UR 등급이라니. 그런 건 게임 뽑기에서나 나오는 단어 아니었나. 3년 동안 아무것도 뜨지 않던 스킬창이 갑자기 최고 등급이라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3년째 로또를 사다가 갑자기 1등에 당첨됐는데, 알고 보니 당첨금을 지급하는 은행이 아직 지구에 없는 느낌이랄까. “그럼 왜 3년 동안 발동 안 됐던 거예요?” “발동 조건이 특수하기 때문입니다. 이 스킬은 ‘초월적 존재’와 조우했을 때만 발동 가능한 조건부 스킬로 추정됩니다. 사부님 같은 이세계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발동할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초월적 존재라니. 저 안경사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은 동네 안경점 사장님이지, 리워야단은 아닌데. 아니, 방금 울프 떼를 손짓 몇 번으로 청소한 걸 보면 인정은 해야겠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했다. 세계관 최강자가 저런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근데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황룡이 이어서 말했다. “이 던전, 그리고 이 세계 전체의 마나 밀도가 극도로 낮습니다. 사부님의 원래 세계 대비 대략 십만 분의 일 수준입니다.” 십만 분의 일?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고장 났다. 십만 분의 일이면 그냥 없는 거 아닌가. 편의점에서 십만 원짜리 상품권을 받았는데 실제 가치가 1원인 셈이었다. “그래서 힘이 그렇게 안 나오는 거예요?” “정확합니다. 사부님이 정상적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마나 농도가 지금보다 최소 만 배 이상 높아야 합니다.” 만 배.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뭐 답이 없구나. 지구에 마나 농도를 만 배로 올릴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이미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강태룡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는 이제 이 세계에서 평생 병약자로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부님. 게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니. 뭔가 큰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정말로 하나 더 늘었다. 던전 탈출, 계약 정체 파악, 이제 여기에 ‘화룡 귀향 프로젝트’까지 추가됐다. 인생 퀘스트 창이 자동으로 갱신되는 느낌인데, 정작 나는 이 퀘스트를 수락한다고 동의한 적이 없었다. “저기, 일단은요…….”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던전 밖으로.” 강태룡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묘하게 사람 같았다. 짜증도 아니고 기대도 아니고, 그냥 무언가 판단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마스터,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나도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일단…… 저랑 같이 다니셔야 할 것 같아요. 계약이 풀리는 방법도 모르니까.” 그 순간 황룡이 다시 말을 걸었다. “참고로 계약 파기 시 반동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확한 수치는 산출 중이지만, 두 분 모두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생명에 위협? 뭐지, 나 지금 목숨 걸고 계약한 거야?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이건 아예 목숨을 담보로 잡힌 대출이었다. 3년 묵혀둔 스킬 하나를 발동시켰다가 인생 전체가 저당 잡힌 느낌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이동이 필요합니다.” 나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일어섰다. 무릎이 아직 완전히 펴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박준혁이 나를 버리고 도망간 게 얼마 전인데, 지금 나는 화룡과 그 화룡의 인공지능 구체를 데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인생이 참, 예측을 벗어난다. 던전 통로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강태룡이 저 큰 몸으로 좁은 통로를 지나갈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놀랍게도 그는 몸을 살짝 숙이는 것만으로 별 무리 없이 통과했다. 저 정도 유연성이면 요가 강사로 전업해도 될 것 같았다. “저기, 마스터.” 강태룡이 걸으면서 물었다. “밖에 나가면 뭐가 있는데?” 뭐가 있냐니.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순간 막막했다. 편의점? 지하철? 배달 앱?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 세계는 던전이 곳곳에 있고, 헌터라는 사람들이 그걸 관리해요.” “헌터.” 강태룡이 그 단어를 곱씹었다. “나 같은 존재는 여기서 뭐라고 불려?” 내가 대답을 미루자 황룡이 대신 나섰다. “공식 명칭은 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편의상 ‘몬스터’ 혹은 ‘보스급 개체’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태룡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보스급 개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몬스터라고?” “객관적인 외형과 능력치를 기준으로 산출한 결과입니다, 사부님.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2미터짜리 화룡의 자존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니,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셋이서,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과 한 개의 구체가 던전 출구를 향해 걸었다.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던전 특유의 눅눅한 공기 사이로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출구였다. “저기만 지나가면 돼요.” 내 말에 강태룡이 빛 너머를 바라봤다. “드디어 이 답답한 굴에서 나가는군.” 그가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 셋이 출구를 향해 몇 걸음을 더 내디딘 순간이었다. 삐이이익―!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통로 안까지 울려 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출구 너머에서 붉은빛이 규칙적으로 번쩍였다. 게이트 주변에 설치된 경광등이 일제히 켜진 모양이었다. 곧이어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렸다. [경고. 등록되지 않은 초월 존재가 감지되었습니다.] [대상 위험도 산정 불가.] [관악 던전 게이트 봉쇄 절차를 개시합니다.] 초월 존재.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태룡을 바라봤다. 강태룡도 경보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마스터.” 그가 출구 너머에서 번쩍이는 붉은빛을 보며 물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손님을 이렇게 맞이하나?” “아마도…… 보통 손님한테는 안 그럴 거예요.” “그럼 내가 특별한 손님이라는 건가?” 그걸 특별하다고 표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대답할 틈도 없이 출구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미확인 반응이 게이트에 접근 중입니다!” “전 인원 대기! 선제공격 금지!” “감정관 도착 전까지 출구를 봉쇄한다!” 철컥, 철컥.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여러 사람이 바닥을 박차는 발소리가 출구 앞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관리국이 우리가 나가기도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