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생마, 혈통을 넘다

1화

오전 6시 17분. 마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나는 눈을 떴다. 짙은 밤색 털이 덮인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늘고, 길고, 아직 내 것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 다리였다. 관절이 접히는 방식이 낯설었다. 무릎처럼 보이는 부위가 사실은 발목이라는 걸 아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전생의 몸은 두 발로 섰다. 지금의 몸은 네 발로 서야 했다. 그 차이 하나가 매일 아침 나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전생에 나는 이도준이었다. 서른네 살, 무직, 경마 덕후. 분석표를 끼고 살다가 죽었고, 눈을 떴을 때는 망아지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지금은 받아들였다기보다 포기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포기. 그 단어를 곱씹을 때마다 목 안쪽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었을 때도 포기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주식이 반토막 났을 때, 마권을 잘못 샀을 때, 이력서를 백 통 넣고도 연락이 없을 때. 그때마다 포기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포기할 대상이 삶 자체였다. 그 차이가 새삼스러웠다. "쟤는 세일에 못 내보내요." 마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박무영, 이 목장의 주인이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억양이랄 게 거의 없었다. 사실만 전달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한번은 보여줘야지." 윤정숙이었다. 박무영의 아내였고, 목소리가 크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윤정숙이 하면 온도가 달랐다. "보여줘도 안 사요." 박무영이 잘라 말했다. "아빠 쪽은 단거리 스프린터고, 외할아버지 쪽은 장거리 스테이어예요." "그게 왜 문제예요?" "섞이면 둘 다 못써요." 나는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숨을 죽였다. 전생의 지식이 그 순간 되살아났다. 머릿속에서 오래된 파일들이 자동으로 열리는 느낌이었다. 스프린터 혈통은 근섬유가 순간적으로 터진다. 백 미터 안에서 모든 걸 쏟아내는 몸이다. 스테이어 혈통은 심장과 폐가 오래 버틴다. 이천 미터를 넘어가도 숨이 흐트러지지 않는 몸이다. 둘을 반씩 물려받으면 어느 쪽도 완성되지 않는다. 근섬유는 터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심장은 버티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둘 다 애매한, 이도 저도 아닌 몸이 나온다. 그게 정설이었다. 나도 인간이었을 때 그 정설을 믿었다. 분석표에 그렇게 적혀 있었고, 배당률이 그렇게 매겨졌고, 결과가 그걸 증명하는 걸 여러 번 봤다. "매각 불가 판정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윤정숙이 물었다. "도태되겠죠." 박무영이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 짧음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도태. 그 단어가 마방 안에 가라앉았다. 공기보다 무거운 단어였다. 바닥에 눕듯이 내려앉아서 다리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미를 바라보았다. 설화, 이 목장에서 가장 조용한 암말이었다. 현역 시절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은퇴했다고 들었다. 전적을 알고 있었다. 열두 번 뛰어서 열두 번 다 입상권 밖. 그런데도 나를 볼 때마다 눈이 부드러워졌다. 그 부드러움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전생에서 나를 그렇게 본 사람은 없었다. 어미의 몸이 내게 다가와 목덜미를 문질렀다. 따뜻했다.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날숨이 내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되지 않았다. 대신 배 속이 차가워졌다. 차가움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 시작해서 가슴 쪽으로. 오전 7시 40분. 박무영이 마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줄자와 노트를 들고 있었다. 노트 표지가 낡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의 숫자가 그 안에 적혀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재는지 알고 있었다. 체중, 체고, 가슴둘레. 숫자로 나를 판정하려는 것이었다. 줄자가 몸을 감쌀 때 서늘한 느낌이 났다. 쇠 자체의 온도라기보다, 그게 무엇을 위한 도구인지 알아서 오는 서늘함이었다. "체중 118킬로." 박무영이 중얼거렸다. "체고 98센티." 또 중얼거렸다. "평균보다 낮진 않은데." 마지막 말에는 미묘한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숫자는 나쁘지 않았다. 숫자만 보면 그랬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숫자를 보고 '괜찮은 편'이라고 메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혈통표를 보는 순간 모든 평가가 뒤집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경마는 숫자로 시작해서 혈통으로 끝나는 게임이었다. 숫자가 아무리 좋아도 혈통이 애매하면 시장은 외면했다. 전생에 본 수백 개의 배합표가 떠올랐다. 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우며 봤던 배합표들. 스프린터와 스테이어를 섞은 말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경주 성적표에 '중도 포기', '거리 부적합' 같은 문구가 나란히 붙어 있던 걸 기억한다. 대부분, 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대부분이라면 아닌 경우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예외가 몇 마리였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답답함이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를 밀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망아지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오전 9시. 윤정숙이 여물을 가지고 왔다. 바구니 안에 여물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많이 먹어." 윤정숙이 말했다. 말이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도, 늘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 말투가 인간이었을 때 들어본 적 없는 말투였다. 누군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담아 온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여물을 먹지 않았다. 식욕이 없었다. 식욕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망아지의 몸은 늘 배가 고파야 정상이었다. 전생의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으로 반응했다. 지금 몸은 반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같은 뇌인데, 다른 몸이라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지나갔다. 오전 10시 20분. 박무영과 윤정숙이 다시 마방 앞에 섰다. "이번 주 세일 명단에서 빼야 할까요?" 윤정숙이 물었다. "빼는 게 나아." 박무영이 대답했다. "괜히 등록비만 날려." 등록비. 돈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나는 몸이 굳었다. 인간이었을 때도 돈 이야기 앞에서 늘 이렇게 굳었다. 카드값 문자가 올 때, 대출 상담 전화가 올 때, 잔고 확인 창을 열 때. 습관은 몸이 바뀌어도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뇌가 몸보다 더 오래된 존재라는 걸, 그런 순간에 실감했다. "그럼 이 녀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윤정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목장에 남겨두거나, 아니면……" 박무영이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내지 않은 말이 더 무서웠다.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입 밖으로 내기도 싫은 결말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어느 쪽도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어미의 옆구리에 몸을 붙였다. 설화는 여전히 조용했다. 조용함이 위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함 자체가 불안했다. 어미도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이라는 동물이 인간의 대화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안다. 분위기는 언어가 없는 존재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오전 11시 5분. 마방 입구 쪽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낯선 소리였다. 이 목장에 낯선 차가 오는 일은 드물었다. 목장은 외진 곳에 있었고,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사료 트럭, 수의사, 가끔 오는 마주. 지금 들리는 엔진 소리는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낮고 부드럽게 갈리는 소리였다. 박무영과 윤정숙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 "누구예요?" 윤정숙이 물었다. 박무영은 대답 대신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 굳음이 두 가지 뜻으로 읽혔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고, 알아서 더 불편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마방 쪽으로 다가왔다. 느리고,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한 걸음이었다.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끊겼다.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는 걸음. 마방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으며 오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나는 그 걸음 소리에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이 배 속에서 꿈틀거렸다. 방금 전까지 차가웠던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감각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전생의 감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몸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발소리가 마방 문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 내가 있는 마방 앞에서. 안경 낀 남자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박무영의 시선과 달랐다. 줄자로 재는 시선이 아니었다. 숫자를 확인하는 시선도 아니었다. 뭔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마치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먼저 읽어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봤다.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었다. 망아지의 다리가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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