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오전 11시 8분.
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인사했다.
박무영이 고개를 숙였다.
"연락받고 오신 거죠?"
"네. 안재현입니다."
안재현.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이도준이었을 때도, 별이 된 지금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서류철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혈통표였다.
그것도 아주 낡고, 아주 많이 읽은 흔적이 있는 혈통표였다.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고, 종이 표면에는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짚었는지 기름 자국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인간이었을 때 나도 그런 서류철을 몇 개나 들고 다녔었다.
밤새 숫자를 들여다보다 잠든 흔적이 종이에 남는다는 걸, 그 종이를 보는 순간 다시 알아차렸다.
그가 마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말을 다뤄본 사람의 걸음이었다.
곧바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멈춰 서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마치 이미 몇 번이나 와본 사람처럼.
손끝으로 내 목덜미를 짚었다.
손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 속에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 쪽 3대가 전부 단거리군요."
안재현이 중얼거렸다.
혈통표를 넘기는 손가락이 빨랐다.
"외할아버지 쪽은 반대로 4대가 전부 장거리고."
박무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저희도 판정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판정이라니."
안재현이 되물었다.
목소리에 아무 감정이 없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매각 불가 얘기가 나오고 있어서요."
"누가 그런 판정을 내립니까."
박무영이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3초.
5초.
그 사이에 안재현은 여전히 내 목덜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안재현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달랐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
윤정숙이 나를 볼 때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박무영이 나를 볼 때는 손익 계산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눈빛에는 둘 다 없었다.
대신 뭔가를 이미 확인하고,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의 눈빛이 있었다.
시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팔아치운 종목을 혼자 사들이는 사람의 표정, 그런 게 있었다.
"이 배합, 실패한 사례가 몇 개 있는지 아세요?"
안재현이 물었다.
박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
"열두 건입니다."
안재현이 말을 이었다.
"열두 건 중 열한 건은 실패했어요."
나는 숨을 멈췄다.
열두 건 중 열하나.
인간이었을 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숫자와 거의 일치했다.
확률이 8퍼센트가 안 됐다.
머릿속에서 그 숫자가 계속 맴돌았다.
8퍼센트.
주식으로 치면 그건 상장폐지 직전 종목이 회생할 확률이었다.
투자자 열 명 중 아홉 명은 눈길도 주지 않을 숫자였다.
"그런데."
안재현이 다시 말했다.
"한 건은 성공했어요."
마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도, 다른 마방에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도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그 한 건이 뭐였는지 아세요?"
박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안재현이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정도였다.
"제가 압니다. 그 말이 나올 때 저도 현장에 있었거든요."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성공했다는 그 한 마리가 누구인지, 어떤 성적을 냈는지,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확신이 진짜라는 건 느껴졌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계산을 마친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 녀석, 팝니다."
박무영이 확인하듯 물었다.
"파신다는 게 아니라 사시겠다는 거죠?"
"제가 산다는 겁니다."
오전 11시 32분.
협상이 시작됐다.
"가격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무영이 물었다.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매각 불가 판정을 앞둔 말에게 가격을 부르는 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이천오백."
안재현이 말했다.
박무영의 눈이 커졌다.
이천오백만 원.
이 목장에서 팔린 말 중 그 정도 가격을 받은 말은 없었다.
나조차 그 숫자에 놀랐다.
머릿속에서 계좌 잔고를 계산하던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이천오백만 원.
그건 내가 인간이었을 때 하룻밤에 잃었던 돈의 절반쯤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목이 말랐다.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닙니까."
박무영이 물었다.
"저는 잠재력에 돈을 냅니다."
안재현이 대답했다.
"지금 이 녀석의 성적표에 돈을 내는 게 아니에요."
잠재력.
그 단어가 이상하게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인간이었을 때도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잠재력이라는 말은 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끝났다.
내가 그랬다.
잠재력이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 잠재력이 실제로 뭔가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가 다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말의 몸으로.
"이 녀석 이름이 있습니까?"
안재현이 물었다.
박무영이 대답했다.
"등록명은 아직 없고, 그냥 여기서는 별이라고 불러요."
안재현이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목덜미가 아니라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빛나는별."
그가 말했다.
"등록명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이름이 내 것이 되는 순간,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이도준이라는 이름이 저 멀리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밀려나는데도, 슬프지가 않았다.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 않았다.
그 공백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이름 하나가 완전히 지워지는 순간인데, 내 몸 어디에서도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오후 1시 15분.
계약서가 작성됐다.
박무영과 안재현이 서명을 주고받았다.
윤정숙이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펜이 종이에 긁히는 소리가 마방 안까지 들려왔다.
사각, 사각.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언제 데려가실 겁니까."
박무영이 물었다.
"내일 오전에 트럭을 보내겠습니다."
안재현이 대답했다.
내일.
그 단어가 마방 안에 떨어졌다.
돌 하나가 물속에 떨어진 것처럼, 파문이 퍼졌다.
박무영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윤정숙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거기서 뭐라도 읽어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나는 어미를 돌아보았다.
설화는 그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을 것이다.
말은 사람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그날 설화의 눈빛은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내일 떠나는구나."
설화가 나를 향해 목을 기울였다.
숨결이 따뜻했다.
나는 그 숨결에 얼굴을 묻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그 생각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인간이었을 때는 슬픈 일이 생기면 먼저 눈물이 나고, 그다음에 이유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유를 먼저 알고 있는데도, 눈물이 나오는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오후 2시 20분.
박무영과 안재현이 마방 밖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트레일러 규격, 도착 예정 시간, 보험 처리 문제 같은 단어들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내 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그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은 자기 몸값을 흥정하는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인간이었을 때도 그런 자리는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 미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들.
그때도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오후 4시.
윤정숙이 여물을 가지고 왔다.
오늘은 조금 먹었다.
"많이 먹어야지. 내일 먼 길 간다."
윤정숙이 목소리를 낮췄다.
먼 길.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말에게 목적지를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여물통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윤정숙이 내 등을 두어 번 쓰다듬고 돌아섰다.
그 손길이 평소보다 조금 길었다.
오후 5시 40분.
박무영이 마방 앞을 지나가며 안재현과 통화를 이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트레일러는 몇 시에 출발하시나요."
"내일 새벽 여섯 시 반에 출발합니다. 여덟 시 도착 예정이고요."
새벽 여섯 시 반.
그 시간이 머릿속에 박혔다.
내일이면 내가 이곳에 없을 시간.
오후 7시.
마방 안이 어두워졌다.
설화가 내 곁에 누웠다.
등이 서로 맞닿았다.
체온이 전해졌다.
내일이면 이 체온을 다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의 무게만큼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눈물이 나야 할 것 같은데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꺼풀 뒤에서 아무것도 차오르지 않았다.
그 텅 빈 느낌이 오히려 더 아팠다.
밤이 깊어졌다.
마방 밖에서 트럭 예약을 확인하는 안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오전 8시."
그가 전화기에 말했다.
"네, 두 마리는 아니고 한 마리만 태우면 됩니다."
한 마리.
나 혼자였다.
설화는 여기 남는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 어딘가에서 뭔가 뚫려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대신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혈통표를 들여다보던 밤들, 자기 앞으로 온 것도 아닌 말들의 인생을 상상하던 밤들.
그때는 그게 남의 이야기였다.
키보드 앞에서 숫자를 두드리며, 이 말이 얼마에 팔릴지, 얼마를 벌어들일지 계산하던 밤들.
그 말들의 눈빛이 어떤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내 이야기였다.
내가 그 눈빛의 주인이었다.
오전 6시 10분.
새벽 공기가 마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윤정숙이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별아."
윤정숙이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밥은 먹었어?"
먹지 않았다.
먹을 수 없었다.
윤정숙은 그걸 알면서도 여물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돌아섰다.
오전 7시 55분.
트럭 소리가 들렸다.
마방 문이 열렸다.
"자, 가자."
박무영의 목소리였다.
나는 설화를 돌아보았다.
설화가 마방 안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나는 트럭에 올라탔다.
발굽이 트레일러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문이 닫혔다.
엔진이 켜졌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한라산이 점점 작아졌다.
나는 그 산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트레일러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려 했다.
이미 마방은 보이지 않는데도, 자꾸 그쪽으로 목을 돌리고 있었다.
안재현이 앞자리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지금 출발했습니다. 도착하면 바로 훈련장으로 옮기죠."
훈련장.
그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야 할 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트럭은 한라산을 등지고 계속 달렸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라짐이 실감 나지 않아서, 나는 그저 눈을 뜬 채로 흔들리는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