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생후 4개월 20일.
나는 여전히 여물을 잘 먹지 않았다.
조련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오늘도 반도 안 먹었네."
그가 여물통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전생의 나는 사료 배합표를 초 단위로 외우던 사람이었다.
조단백질 함량, 섬유질 비율, 칼슘과 인의 균형까지.
그런데 지금 이 몸은 그 완벽한 이론을 배신하고 있었다.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오전 6시.
나는 마방 문틈으로 목을 내밀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콧속으로 밀려드는 냄새들을 하나씩 구분했다.
건초 냄새, 흙냄새, 멀리서 오는 바닷바람 냄새.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 확인했다.
남쪽에서 부는 바람이라면, 제주도 쪽에서 오는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말이 바람의 방향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어미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콧구멍을 최대한 벌리고 그 바람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날은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오전 8시.
조련사가 나를 트랙으로 데려가려 했다.
줄이 목 아래로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발을 떼지 않았다.
네 다리가 땅에 박힌 것처럼 무거웠다.
"왜 안 가려고 해."
조련사가 줄을 당겼다.
손목의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마방 뒤편, 창고 쪽이었다.
그쪽에서 말 냄새가 강하게 났다.
다른 마방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창고 근처에 나이 든 암말 몇 마리가 있었다.
은퇴한 말들이었다.
햇살 아래 가만히 서서 되새김질을 하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 냄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설화의 냄새와 비슷한 무언가를.
땀에 젖은 갈기, 젖 냄새가 섞인 살냄새, 숨소리의 리듬까지.
"뭐 하는 거야."
조련사가 다시 줄을 당겼다.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암말들 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털색이 비슷했다.
짙은 밤색.
순간 심장이 뛰었다.
다리가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자 그 말은 설화가 아니었다.
눈빛도, 냄새도, 숨소리도 전혀 다른 말이었다.
눈동자 색이 달랐고, 코 주변의 무늬도 달랐다.
숨소리는 더 낮고 거칠었다.
실망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실망조차 완전한 형태로 오지 않았다.
실망해야 하는데, 절반만 실망한 느낌이었다.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말의 눈은 원래 눈물을 그런 식으로 흘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련사가 결국 나를 억지로 트랙 쪽으로 끌고 갔다.
발굽이 흙바닥을 끌며 자국을 남겼다.
"오늘 좀 이상하네."
그가 안재현에게 보고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오전 9시.
안재현이 나를 보러 왔다.
발소리가 익숙했다.
느리고 신중한 걸음.
"괜찮아?"
그가 물었다.
손이 내 목덜미를 쓸었다.
따뜻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설화의 눈빛과 비슷한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안재현의 눈빛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다.
계산이 섞인 애정, 혹은 애정이 섞인 계산이었다.
설화의 눈빛에는 그런 계산이 없었다.
그냥 나를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밥 안 먹었다며."
안재현이 여물통을 흘깃 봤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겠지."
그가 손으로 내 배를 짚었다.
체온을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나는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몸은 괜찮았다.
문제는 몸이 아니었다.
오전 11시.
나는 훈련을 거의 하지 않았다.
조련사가 걷는 것만 시켰다.
그마저도 흐트러진 걸음이었다.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걸음, 리듬이 어긋난 발굽 소리.
"이상하네, 진짜."
조련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트랙 가장자리를 향해 계속 시선을 돌렸다.
저 너머 어딘가에 설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설화는 여기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목장에 있었다.
오후 2시.
안재현이 박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방 근처에서 그 통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박무영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화 상태는 어떤가요?"
안재현이 물었다.
"임신 초긴데 안정적이에요."
박무영이 대답했다.
"밥도 잘 먹고, 새끼 생각도 별로 안 하는 것 같고요."
새끼 생각도 별로 안 하는 것 같고요.
그 말이 내 안에 떨어졌다.
물속에 던진 돌처럼, 파문이 번져나갔다.
어미는 이미 나를 지나간 시기로 넘긴 것이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살아간다.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고, 젖이 떼지면 관심을 새로운 새끼에게 옮긴다.
이유식이 끝나면 어미와 새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그게 말의 생리였다.
나는 그 생리를 이해했다.
인간이었을 때 배운 지식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
말의 모성은 인간의 모성과 다르다는 것.
그것이 냉정함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라는 것.
학술적으로, 진화적으로, 완벽하게 설명 가능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해한다는 것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물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마름이었다.
오후 4시.
안재현이 다시 마방으로 왔다.
이번엔 얼굴이 조금 더 심각했다.
손에 노트를 들고 있었고, 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별아, 이제 방향을 정해야 할 때가 됐어."
그가 말했다.
방향.
무슨 방향인지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었다.
"스프린트로 갈지, 스테이어로 갈지."
안재현이 노트를 펼쳤다.
숫자들이 가득했다.
지난 훈련의 기록들이었다.
초 단위로 쪼개진 랩타임, 심박수, 회복 속도까지.
"둘 다 살리려다가는 둘 다 죽어."
그가 말했다.
낮고 단정적인 목소리였다.
"이제 하나를 골라야 해."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서히 이해했다.
지난번 트랙에서 두 리듬이 하나로 합쳐지는 조짐을 보였던 순간, 그건 아직 완성이 아니었다.
그 순간을 유지하려면 훈련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방향을 정하는 순간, 다른 쪽의 가능성은 영원히 닫힌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봤을까.
배합표를 읊으며, 혈통표를 넘기며, 이 결정을 데이터의 문제로만 취급했을 것이다.
스프린터형 근섬유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 스테이어형 지구력 유전자가 얼마나 발현됐는지.
숫자로만 존재하는 결정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결정이 내 다리 근육 하나하나에, 내 심장이 뛰는 방식에, 내 폐가 공기를 삼키는 속도에 그대로 새겨질 것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재현이 말을 이었다.
그가 잠시 멈췄다.
망설임이었다.
혈통 덕후인 그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노트를 쥔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스테이어 쪽으로 크는 게 안전할 것 같긴 한데."
그가 말했다.
"그런데 지난번 트랙에서 본 그 마지막 스퍼트."
그가 노트를 다시 들여다봤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느렸다.
"그건 스프린터 쪽의 재능이었어."
나는 숨을 죽였다.
안전한 길과, 재능이 빛나는 길.
둘은 같은 길이 아니었다.
하나는 오래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짧고 강렬하게 터지는 몸을 만드는 길이었다.
둘 다를 원하는 건 욕심이었다.
그리고 욕심은 대개 둘 다를 무너뜨렸다.
"결정은 언제 내리시는 건가요."
조련사가 물었다.
안재현이 노트를 덮었다.
"내일."
그가 짧게 대답했다.
내일이라는 말이 마방 공기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후 6시.
조련사가 마방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내일 마사회 쪽에서 사람이 온다던데요."
안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문 위원이 방향 결정에 도움을 준다고 했어요."
마사회에서 사람이 온다는 말.
내 방향을 남이 결정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전생에 나는 그런 자문 위원들의 말을 신처럼 받아들이는 마주들을 여럿 봤다.
그들이 내린 판정 하나로 어떤 말은 스타가 됐고, 어떤 말은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 그 판정의 대상이 나였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조련사가 잠시 멈춰 나를 바라봤다.
"넌 어느 쪽이 더 좋아?"
그가 물었다.
장난처럼 던진 질문이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오후 8시.
나는 여물통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엔 조금 먹었다.
씹는 감각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어미를 향한 슬픔은 여전히 완전한 형태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감각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불안이라고 부르기도, 기대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감각이었다.
내일이면 내 방향이, 어쩌면 내 남은 삶의 형태가 결정될 것이었다.
스프린터로 살 것인지, 스테이어로 살 것인지.
전생에 나는 수백 개의 배합표를 읊으며 이런 결정을 남의 일처럼 구경했다.
누군가의 말이 스프린터로 결정되면 나는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누군가의 말이 스테이어로 결정되면 나는 그 훈련 프로그램을 검토했다.
언제나 나는 관찰자였다.
지금은 그 결정이 내 다리, 내 심장, 내 폐를 향해 오고 있었다.
관찰자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그 사실이 낯설고 무거웠다.
마방 밖에서 안재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전화가 아니라 조련사와의 대화였다.
"자문 위원 이름이 뭐라고 했죠?"
"조태석 기수 쪽 사람이라던데요."
조태석.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나온 순간, 마방 안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느꼈다.
안재현의 목소리 톤이 살짝 낮아졌다.
조련사도 잠시 말을 멈췄다.
"조태석 기수요?"
조련사가 되물었다.
"그 유명한 기수 말하는 거예요?"
"네. 요즘 자문 쪽으로 많이 활동한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그 이름이 앞으로 내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이름 하나가 공기를 바꿔놓는 그 감각만이 남았다.
마방 안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조태석.
조태석.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무언가가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밤이 깊어질수록 마방 안은 조용해졌다.
다른 말들의 숨소리, 발굽이 바닥을 긁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바람 소리.
나는 눈을 감았다.
설화의 냄새를 다시 떠올리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대신 내일 올 낯선 이름, 조태석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이름이 가져올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닐 거라는 예감만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