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갑 부장님, 몬스터로 부활

4화

격리탑 규정집은 낡은 가죽 표지에 금박이 반쯤 벗겨진 두꺼운 책이었다. 은채는 그걸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조항을 읽었다. "'소환 실패 개체는 지정 구역을 벗어날 수 없으며, 관리자 외 접촉을 금한다.'" 그녀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나에게 들려주려고, 한 번은 자기 자신에게 확인시키려고 그런 것 같았다. 미간이 좁게 접혔다. "규정상으로는, 너는 나 말고 아무도 만날 수 없어." "그래서요?"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대답했다. 이 방에 갇힌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다. 창문은 크지만 열리지 않았고, 문은 밖에서만 잠글 수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관리자인 그녀가 식사를 들고 오는 것 외에는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불편하지 않겠냐고." "현자님만 있으면 됩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진심의 절반, 장난의 절반쯤 되는 그런 말. 그런데 그녀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니, 이 사람 얼굴색이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게 붉어졌다. 드워프 특유의 거친 피부 위에서도 그 붉은 기운이 그대로 드러났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규정집을 덮고 창가로 갔다. 등을 돌린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등이 왜인지 조금 작아 보였다. 최고 현자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현자님." "뭐." "수염, 불편하지 않으세요?"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그녀가 돌아보는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드워프 여성에게 수염이 종족 특성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배운 몇 안 되는 상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가 매일 아침 그 수염을 정리하고, 가느다란 빗으로 끝을 다듬고, 은실로 몇 가닥씩 묶어 정돈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냥 습관이라고 하기엔 손끝이 너무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은 이걸 흉하다고 해." "저는 안 그런데요." "거짓말." 즉답이었다. 오래 들어온 말인 것 같았다. 익숙하게, 지겹게. "진짠데요. 저도 지금 이 몸으로 다니면 다들 도망치잖아요. 흉하다는 기준이 다 다른 거죠." 내 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이 예전보다 두 배는 길고, 손톱은 검게 변해 있었다. 소환에 실패하면서 얻은 몸이었다. 인간이었던 흔적이 아직 얼굴에는 남아 있지만, 팔다리는 이제 이 세계의 어떤 짐승을 닮아가고 있었다. 처음 이 몸을 거울로 봤을 때는 나조차 몸서리쳤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는 걸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생각하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무겁지 않았다. 창밖으로 저녁 종소리가 울렸다. 탑 전체가 잠깐 진동하듯 종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졌다. "이정호." 처음으로 내 이름을 그대로 부른 순간이었다. 존칭도 없이, 담담하게. 그동안 그녀는 나를 '소환 개체' 혹은 '거기'라고만 불렀다. 이름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그 두 글자가 낯설게 들렸다. 내 이름인데도. "규정을 어기고 너를 조수로 등록할까 해." "그게 뭔 차이가 있는데요." "조수는 관리자와 동행 시 외부 출입이 가능해. 나랑 같이 있으면, 밖에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야." 의외의 제안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쳐다봤다. 격리 규정을 어기는 거라면 그녀에게도 부담이 될 텐데. 최고 현자라는 자리가 아무리 높다 해도, 규정 위반은 위반이다. 문책이 없을 리 없었다. "괜찮으세요? 이거 규정 위반이라면서요." "규정은 내가 만드는 거야. 최고 현자잖아." 그 말투가 어쩐지 우스웠다. 방금까지 조심스럽던 사람이 갑자기 당당해지니, 나는 헛웃음이 났다. 조금 전까지 얼굴이 붉어져서 창가로 도망치듯 걸어갔던 사람이, 지금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부탁이 아니라 결정이야." "네네, 결정이요." 그녀는 나를 슬쩍 흘겨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퍼졌다. 그 서명을 하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못 본 척했다.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서명이 끝나자 그녀는 서류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오늘부터 넌 내 조수야. 대외적으로는." "대내적으로는요?" "대내적으로는 신경 쓰지 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따라와." 그날 밤, 처음으로 탑 옥상에 올라갔다. 은채가 나를 데리고 나온 거였다. 좁은 나선 계단을 오르는 동안, 등 뒤로 그녀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따라왔다. 계단 끝에 있는 낡은 철문을 밀자 차가운 밤바람이 확 쏟아졌다. 하늘이 이렇게 넓다는 걸,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다. 열흘 동안 창문 하나로만 세상을 봐 왔던 탓인지, 눈앞에 펼쳐진 별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세계의 별자리는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달랐다. 붉은 별 하나가 유난히 크게 빛나고 있었다. "좋네요." "……그래." 그녀는 대답을 흐리며 옆에 서 있었다.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바람에 수염 끝이 살짝 흔들리는 걸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그 순간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격리탑에 갇힌 실패한 소환 개체와, 그걸 관리하는 최고 현자가 나란히 별을 보고 있다니. 누가 봐도 우스운 조합이었다. 그런데도 나쁘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저녁을 제대로 못 먹었다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 이런 순간에도 배는 고프구나, 하는 생각에 나 혼자 웃음이 났다. "뭐가 웃겨." "아뇨, 그냥." 그런데 그 평온함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나는 곧 알게 됐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걸음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두세 명, 발을 맞춰 걷는 소리. 군인이나 관리들이 걷는 방식이었다. 은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조금 전까지 난간에 걸쳐 있던 팔이 어느새 내려와 있었고, 눈빛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워졌다. "누구예요?" "……왕궁 감사관."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섞였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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