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연가의 안채 대청마루에는 국화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고, 문중 어른들이 둘러앉은 자리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시조부의 기일을 맞아 문중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큰 행사였는데, 서연은 아침부터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느라 손끝이 다 부르텄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서연은 옥색 한복 치맛자락을 살포시 여미며 어른들께 차를 따르고 있었는데, 종부로 시집온 지 삼 년째임에도 여전히 이 자리가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어른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마치 시험지처럼 느껴졌고, 찻잔을 놓는 손끝이 조금이라도 떨리면 누군가 눈치채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목덜미가 뻣뻣해지곤 했다. 그래도 옆에 앉은 남편 강태준이 슬쩍 눈짓을 보내며 미소 지어줄 때마다, 서연은 그 낯섦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며느리는 참 야무지구나." 큰어머니뻘 되는 어른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고, 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이며 "과찬이세요……"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태준의 손이 슬쩍 그녀의 손등을 스치듯 덮었다가 떨어졌는데, 그 짧은 온기에 서연의 귀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어도 이런 사소한 손길 하나에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그만큼 태준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보, 힘들지 않소?" 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은 다리도 저리고 허리도 뻐근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또 어른들 사이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애써 삼켰다. 태준은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하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어른들도 사랑채로 물러가자, 서연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뒤뜰로 나갔다. 온종일 부엌과 대청을 오가며 쌓인 열기를 식히고 싶었던 참이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이마의 열기를 식혀주었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만끽했다. 뒤뜰 한쪽에 심긴 감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잎사귀 부딪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어쩐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는 서둘러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서연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손에 남은 것은 흰 봉투 하나였다.
서연은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살펴보았다. 겉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었고, 봉투 자체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흰색이었다. 누가 이런 걸,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안에는 컴퓨터로 인쇄된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남편과 강하은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순간 서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은이라니, 자신이 친언니를 잃고 오 년째 딸처럼 키워온 그 아이의 이름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인 고등학생 하은은 서연에게 있어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서연이 손수 거두어 키우다시피 한 아이였고, 태준 역시 그런 하은을 조카처럼, 아니 딸처럼 아껴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둘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웃음보다 먼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거지. 서연은 봉투를 든 손을 가슴께로 가져오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손끝의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편지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도 문장은 짧고 명료했다. 짧아서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서연아,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연은 화들짝 놀라 봉투를 얼른 한복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애써 누르며 돌아보니 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서연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태준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는데,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세필로 그린 그림처럼 다정하고 온화해서, 방금 전 읽은 편지의 내용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저렇게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오?" 태준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 하자, 서연은 순간적으로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 짧은 거리감을 태준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거두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태준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소매 속 봉투의 감촉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저릿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태준의 팔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걸음걸이마저 평소와 다르게 뻣뻣했다.
그날 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집 안이 조용해지자, 서연은 침실에 홀로 앉아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태준은 뒤처리를 마무리하느라 아직 사랑채에 남아 있었고, 서연은 그 틈을 타 서랍 속 깊이 숨겨둔 편지를 꺼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문장은 짧고 명료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태준과 하은이라니. 말도 안 돼. 그 착하고 순한 하은이가, 그리고 자신에게 그토록 다정한 태준이가.
서연은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하은이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마다 함께 집안일을 돕던 모습, 태준이 하은의 학비나 용돈을 챙겨주던 일,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웃던 모습들……. 그 모든 것이 평범한 삼촌과 조카 사이의 정이라 여겼는데, 이제 와서 그 기억들을 다시 곱씹으려니 어딘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니, 아니야. 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 이건 분명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이거나 모함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서연은 편지를 구겨 서랍 깊숙이 넣어버린 후에도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 누운 태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서연은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편지의 문장을 되뇌었다. 유심히 살펴보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보라는 뜻일까. 이미 벌어진 일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하는 걸까.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고, 서연은 그 빛을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별일 아닐 거야,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이거나 악의 어린 모함일 뿐이야.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태준의 잠든 얼굴을 슬쩍 돌아보니, 달빛을 받은 그 옆얼굴이 여전히 조각처럼 아름다워서, 서연은 그런 얼굴로 자신을 배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럴 리 없다는 생각 사이에서 몇 번이고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씨앗은, 서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