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남편이, 내 조카랑?

3화

며칠이 지났지만, 서연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믿었던 편지의 그림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면 태준이 출근을 하고, 하은은 등교 준비를 하고, 서연은 두 사람의 도시락을 챙기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이따금씩, 정말 이따금씩, 태준과 하은 사이에서 미세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마치 잘 짜인 옷감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실 하나가 어긋나 있는 것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손끝으로 만지면 분명히 걸리는 그런 위화감이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탁 위에는 서연이 정성 들여 준비한 갈비찜과 나물 반찬들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태준이 무심코 콩나물무침을 집으려 젓가락을 뻗은 순간, 마침 같은 반찬을 향해 손을 뻗던 하은의 젓가락과 짤막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딱,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거두며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찰나였다.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는데도, 서연은 그 침묵의 밀도가 유독 진하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젓가락질을 멈추고 말았다. 국그릇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허공에서 잠시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죄, 죄송해요." 하은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태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시선을 애꿎은 창밖으로 돌렸다. "아니, 괜찮아. 뭐 그런 걸 가지고." 별일 아닌 상황이었다. 그저 젓가락이 부딪힌 것뿐이었으니까. 세상 어느 식탁에서나 일어날 법한, 지극히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어깨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후로도 십여 분이 넘도록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밥그릇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 저렇게 서먹서먹한 사이였던가. 서연은 국을 뜨는 척하며 곁눈질로 두 사람을 살폈지만, 딱히 짚이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식사 후, 서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척하며 슬쩍 두 사람을 관찰했다. 화면 속에서는 요란한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서연의 귀는 온통 부엌 쪽으로 쏠려 있었다. 태준은 서재로 향하며 하은에게 짧게 말을 건넸다. "숙제 다 했어?" "아, 네, 거의요." 하은이 대답하면서 태준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는데, 그 미소가 유독 서연의 눈에 밟혔다. 저렇게 웃는 애였나. 평소 하은은 낯을 가리는 편이라 웃음이 헤픈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그 미소는, 뭐랄까, 평소와는 결이 다른 것 같았다. 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애써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 요즘 사춘기잖아. 사춘기 애들 감정 기복이야 원래 그런 거지. 다음 날에는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서연이 빨래 바구니를 들고 우연히 하은의 방 앞을 지나다가, 문틈 사이로 안에서 들려오는 태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문제, 이렇게 풀면 돼. 여기서 인수분해를 먼저 해야지." 흔한 과외 지도 같은 상황이었다. 태준이 원래 수학을 잘 가르쳐서 하은의 학업을 종종 봐주곤 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다 말고 문틈으로 살짝 본 두 사람의 거리가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태준이 하은의 어깨 너머로 몸을 기울인 채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머리가 거의 맞닿을 듯한 각도였고, 하은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서연은 분명히 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붉은 기운이었다. 서연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되짚어 나오는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저 공부를 봐주는 것뿐이야, 이모부니까 당연한 거야. 서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치 물에 젖은 종이처럼, 아무리 펴려 해도 자꾸만 구겨진 자국이 남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설거지를 마친 서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태준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 하은이 공부 많이 봐주시네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던 것 같기도 했다. "응, 저 아이가 요즘 성적이 좀 떨어져서. 담임 선생님도 걱정하시더라고." 태준이 신문에서 눈을 떼고 웃으며 되물었다. "왜, 신경 쓰여?" 그 물음에 서연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태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를 안심시키듯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당신도 참, 별걸 다 신경 쓴다니까." 하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서연의 마음속 불씨는 그 짧은 대화 이후로 오히려 조금씩 더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평온한 하루하루였지만, 서연은 반복되는 이런 사소한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애써 눌러왔던 편지의 내용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부딪힌 젓가락, 스치는 시선, 문틈 사이로 본 붉어진 뺨.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조각들인데, 그것들이 자꾸만 서연의 머릿속에서 이어 붙여져 하나의 불길한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우연일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서연의 눈은 이제 자연스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밥상에서 앉는 자리, 대화를 나눌 때의 눈빛, 지나칠 때 스치는 손끝까지도. 그리고 그 눈길이 향하는 곳에서, 서연이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