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간 서연은 애써 태연한 척 일상을 이어갔다. 아침이면 여느 때처럼 식탁에 앉아 죽을 뜨고, 낮에는 정원을 산책하며 화초에 물을 주고, 밤이면 태준과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는 척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리운 평온과는 달리, 마음속에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의심의 불씨가 조금씩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태준의 눈빛이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 하은이 유독 태준 앞에서만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는 것,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들이 하나둘 쌓여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집안의 젊은 집사 한지훈을 조용히 불렀다. 서재 문을 닫고 마주 앉으니, 그의 단정한 이목구비와 곧게 편 어깨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늘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하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훈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한지훈은 그녀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말씀하세요, 마님."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눈빛에는 이미 눈치 빠른 그가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다는 기색이 스쳤다.
"태준씨의 최근 지난 일 년간 공무 외출 기록이랑, 하은이 외박 기록 좀 정리해줄 수 있을까요." 말을 뱉는 순간, 서연은 스스로도 이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생각했다. 남편의 뒤를 캐는 아내라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 말을 입 밖에 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글펐다.
한지훈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혹시,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마님 곁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의 정직하고 신중한 태도에 서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지만, 동시에 이런 일을 부탁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아니에요, 지훈씨. 그냥…… 확인만 하고 싶은 거예요." 서연은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을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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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서연은 방에 홀로 앉아 순정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하늘하늘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서연은 문득 며칠 전 자신이 순정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요즘 태준씨랑 하은이랑, 좀 이상하지 않아? 그때 순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그 미묘한 표정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그저 지나가는 말인 척 물었지만, 순정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던 것을 서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십칠 년이었다. 서연이 열 살 때부터 함께해온 순정은, 부모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곁에서 지켜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준 것도, 사춘기 시절 첫사랑에 실패하고 밤새 울던 서연의 등을 두드려준 것도 순정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설령 무언가를 알고 있다 해도 반드시 말해줄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이 지금 이 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순정아." 서연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고, 순정은 찻잔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마님." 그 대답이 유독 조심스럽게 들린 것은 서연의 착각이었을까. "저번에 내가 물어봤을 때 말이야,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서연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추궁이 담겨 있었고, 순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서연은 놓치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시선이 찻잔에서 벽으로, 다시 바닥으로 옮겨가는 것도.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순정이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는데, 그 반응이 오히려 서연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놓았다.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 순정이 이렇게 눈을 피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정아, 너 뭔가 알고 있었지." 서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순정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서연은 이미 답을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마님, 저는……" "말해봐, 뭘 봤는데." 서연이 다급하게 다그치자, 순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에, 하은이 방에서 나오시는 태준 님을 본 적이 있어요. 새벽에요." 순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의 세상이 순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서연은 겨우 벽에 기대어 몸을 지탱해야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흔들리며 뜨거운 차가 손등 위로 흘렀지만, 그 뜨거움조차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마음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그런데 왜,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서연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순정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마님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오해였으면 하는 마음에……" 순정의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혹시나 제가 잘못 본 거라면, 괜히 마님 마음만 어지럽힐까 봐, 그래서……" 변명처럼 이어지는 말들이 서연의 귀에는 아무 의미 없는 소음처럼 들렸다.
서연은 그 말을 들으며 배신감과 서글픔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십칠 년을 함께한 사람마저도 진실을 감추었다는 사실이,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에게조차 온전히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기분이었다.
"나가봐." 서연이 겨우 내뱉은 말에 순정은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방을 나갔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방 안을 울렸다. 홀로 남은 서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아까 흘린 차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서연의 흐느낌만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저편 어딘가에서, 태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연의 가슴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