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괭이질을 하던 손을 멈췄다. 손끝이 시큰거려서 잠깐 허리를 폈다. 오 년째 밭을 갈고 있는데도 이놈의 손은 여전히 물집이 잡힌다. 공주 손이라 그런가. 아니, 공주 손이었던 손이라고 해야 하나.
대현제국의 막내 공주, 강서윤. 그게 나였다. 지금은 궁에서 세 마장쯤 떨어진 변방 촌구석에서 오이 넝쿨이나 정리하고 있지만.
"엄마, 이거 봐. 벌레."
딸 하린이 흙투성이 손으로 뭔가를 들어 올렸다. 초록색에 다리가 여덟 개쯤 달린 그것을 보고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저리 치워. 엄마 그거 무서워."
"공주님이 벌레를 무서워해?"
"공주님도 사람이야, 하린아."
"근데 공주는 궁에서 사는 거 아니야? 옆집 할머니가 그러던데."
이럴 때 보면 다섯 살짜리치고 눈치가 너무 빠르다. 나는 대답 대신 하린의 이마에 묻은 흙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 닦아줬다.
"그건 나중에 크면 얘기해줄게."
"맨날 나중에래."
딸이 까르르 웃었다. 다섯 살짜리가 벌써 나를 놀릴 줄 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서글펐다. 이 아이는 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왕궁의 예법도, 귀족들의 눈치도 모른다. 그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린을 가진 걸 알았을 때 나는 궁을 나왔다. 정확히는 쫓겨났다는 표현이 맞았다. 아버지는 조용히 넘어가려 했지만 의모인 윤미경이 가만있지 않았다. 사생아를 낳은 공주라니, 황실의 수치라나 뭐라나.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놀랄 기력도 없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짐 하나 챙길 새도 없이 등을 떠밀리듯 궁문을 나섰고, 시녀 하나가 몰래 쥐여준 은전 몇 닢으로 이 촌구석까지 흘러들어왔다. 처음 반년은 하루하루가 버티기였다. 손에 익지 않은 호미질에 물집이 터지고, 부른 배를 안고 우물물을 길으러 다녔다. 그래도 이상하게, 서럽지가 않았다. 궁에서는 매일 웃는 얼굴 뒤에 칼을 숨긴 사람들 틈에서 숨죽이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적어도 누가 나를 죽이려 드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날 이후 오 년. 밭을 갈고 닭을 치고 딸을 키우며 살았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궁에서의 삶보다 훨씬. 하린이 첫걸음을 뗐을 때, 첫말을 뱉었을 때, 그 모든 순간을 나 혼자 다 지켜봤다는 게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좋았던 삶이, 오늘 오후 끝장났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불길했다. 시골에서 말 세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오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도적이거나, 왕실 사자거나. 대문 앞에 멈춰 선 것은 후자였고, 나는 도적이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들이 히힝, 콧김을 뿜으며 멈춰 섰다. 예복 자락에 흙먼지가 묻는 것도 신경 안 쓰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강서윤 공주님이십니까."
예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나는 흙 묻은 손을 대충 앞치마에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황명입니다. 즉시 입궁하시라는."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황실 문장이 찍힌 붉은 밀랍. 다섯 손가락이 다 떨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봉투를 뜯었다.
내용은 간결했다. 전 황비 윤미경, 급환으로 위독. 딸 강하린을 대동하여 즉시 귀궁할 것.
윤미경이. 나를 쫓아낸 그 여자가. 위독하다고.
읽고 또 읽었다. 글자가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내용은 그대로였다. 윤미경, 위독. 하린 대동, 즉시 귀궁.
"엄마?"
하린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궁에서 나는 실패한 공주였고, 낳지 말았어야 할 아이를 낳은 오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궁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하린까지 데려오라며.
윤미경이 위독한 것과 하린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 상관이 있으니 저 종이에 적혀 있는 거겠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키기 시작했다.
"부인, 사정이 급합니다."
사내가 재촉했다. 목소리에서 조바심이 묻어났다. 나는 하린을 내려다봤다. 흙 묻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이 작은 사람. 이 아이를 데리고 그 뱀 소굴 같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짐 챙길 시간은 주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반나절만."
사내가 순순히 물러났다. 예상보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원래 황명이란 건 숨 쉴 틈도 안 주고 몰아붙이는 게 정상 아니던가.
나는 하린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 년간 쌓아온 살림을 정리하는 데는 반나절도 길었다. 실은 짐이랄 것도 별로 없었으니까. 옷 몇 벌, 하린이 좋아하는 천 인형, 그리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손거울 하나. 궁을 나올 때 유일하게 챙겨온 물건이었다.
"우리 어디 가?"
하린이 물었다. 나는 아이의 옷가지를 챙기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엄마 고향에."
"좋은 데야?"
"글쎄."
좋은 곳이었던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화려하고, 냉랭하고, 사람들이 웃는 얼굴 뒤에 칼을 숨기고 다니는 곳. 그게 내가 기억하는 왕궁이었다.
"거기 가면 벌레도 있어?"
"있겠지. 사람보다야 낫겠다."
하린은 그 말뜻도 모르면서 그냥 좋다고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이 웃음이 궁에 들어가서도 그대로일 수 있을까.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밭을 돌아봤다. 오이 넝쿨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것들은 누가 돌보나. 옆집 아저씨한테 부탁이라도 하고 갔어야 했나. 이런 한가한 걱정이나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마차가 출발했다. 하린은 창밖 풍경이 신기한지 연신 손가락질을 해댔다. 지나가는 나무며, 개울이며, 심지어 길가에 늘어선 돌멩이 하나까지도 신기해하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을 밖을 나가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 옆에서 점점 다가오는 익숙한 첨탑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을 거야. 이번엔 괜찮을 거야.
근거 없는 자기 위안이었다. 오 년 전에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믿었었다. 그리고 쫓겨났다. 이번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나.
마차 바퀴가 성문 앞 돌길에 닿는 순간, 나는 오 년 전 그날처럼 다시 심장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마저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등 떠밀려 나가던 그 문을, 오늘은 반대로 들어서고 있다는 게 기묘했다.
"엄마, 저기 사람들 진짜 많다."
하린의 목소리에 창밖을 보니 성문 앞에 벌써 귀족들 몇몇이 나와 있었다.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고, 저마다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마차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이번 귀궁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마차가 멈춰 섰다. 사내 하나가 문을 열었다. 나는 하린의 손을 꽉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이 성문 돌바닥에 닿는 순간, 귀족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저것 좀 봐, 아이까지 데려왔어."
"쯧쯧, 뻔뻔하기도 하지."
들으라는 듯 뱉어지는 말들이었다. 나는 하린이 듣지 못하도록 슬쩍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저 안쪽, 궁의 심장부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봤다.
윤미경이 위독하다는 소식 하나로 오 년의 평화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