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형제 황궁, 귀환 공주

2화

성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시선이 따가웠다. 마차 바퀴가 돌길 위를 구르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귀족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라움과 경멸이 반씩 섞인,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무시. 귀족들은 대놓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았다. 그럴 만큼 무례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신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옆 사람과 소곤거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게 더 지독했다. 차라리 삿대질을 하지. 저 정중한 척하는 속삭임이 훨씬 더 아팠다. "저 아이가 그……" "쉿, 들려요." 다 들렸다. 부채 뒤에 숨겨봐야 목소리는 그대로 새어 나왔다. 궁정 예법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소리는 다 들리게 하면서 안 들리는 척하는 게 예의라니. 밭에서 옥수수 따던 시절엔 상상도 못 할 화법이었다. 하린은 다행히 마차 창밖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조그만 손가락으로 성벽의 조각상을 가리키며 뭐라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딸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이 아이 귀에는 저 소곤거림이 절대 들어가면 안 됐다. 알현실은 오 년 전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향과 위선이 뒤섞인 냄새. 이 냄새를 다시 맡게 될 줄은 몰랐다. 문이 열리고 나는 하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알현실 전체로 퍼졌다. 상석엔 장형 강태오가 앉아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흰 피부. 오 년 전보다 조금 더 무게가 실린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소만 보면 다 잊고 그냥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문제는 저 미소가 진심인지 아닌지 나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였다. "서윤아. 오랜만이구나."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눌러 삼켰다. 왼편에 앉은 검은 머리 사내가 나를 훑어봤다. 차형 강지훈, 제국 총리. 나를 보는 눈빛에 반가움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공주님께서 이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입궁하실 줄은 몰랐군요." 그의 첫마디가 그거였다. 정중한 어투에 날이 서 있었다. 오 년 만에 만났는데 첫마디가 옷차림 지적이라니. 역시 강지훈다웠다. "그간 밭일을 좀 했거든요." "밭일이라. 참으로 공주다우십니다." 비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헷갈리게 말하는 재주가 여전했다. 저 화법은 오 년이 지나도 안 변하는구나. 나는 애써 웃으며 넘겼다. 여기서 발끈하면 지는 거다. 오른편에는 빨간 머리에 갈색 피부, 근육질 체구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삼형 강도현. 그는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대뜸 물었다. "그 애가 네 딸이냐." 돌려 말할 줄 모르는 것도 여전했다. 이 남자는 오 년이 지나도 화법이 그대로였다. 직진, 직진, 또 직진. "네. 강하린이라고 합니다." 하린이 내 다리 뒤에 숨었다. 손가락으로 내 치맛자락을 꽉 쥐는 게 느껴졌다. 강도현이 그런 하린을 보고 픽 웃었다. "낯을 가리는군. 애비 닮았나." 순간 알현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태오가 헛기침을 했다. "도현아." "뭐,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가 갈렸다. 애비. 그 단어 하나에 담긴 조롱을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웃긴 게, 하린의 진짜 아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하린의 진짜 아빠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다들 상상만으로 떠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회색 머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대신관 한서준. 걸음걸이부터가 달랐다. 조용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음. 겉보기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미소 뒤에 뭐가 숨어 있는지. "어머니께서 위독하십니다. 공주님을 뵙고 싶어 하셨지요." 어머니. 나에게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여기선 그렇게 불러야 했다. 호칭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게 걸려있다는 걸 이 궁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뵈러 가겠습니다." "그전에." 한서준이 하린을 내려다봤다. 그 시선이 서늘했다. 마치 물건의 가격을 매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 아이의 신분은 어찌 정리하실 겁니까. 사생아를 궁 안에 두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인데요." 전례가 없다니.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하린을 내치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오 년 만에 다시 온 궁정에서 제일 먼저 듣는 말이 딸을 버리라는 소리라니. 참 한결같아서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 딸입니다. 제가 책임집니다." "책임이라는 말로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님. 황실의 법도가 있는데……" "법도라는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내 말에 알현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한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지나친 건 그쪽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불러다 놓고 자식 신분 타령이나 하는 게." 강지훈이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밌다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남자는 항상 저랬다. 남의 싸움 구경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공주님, 여긴 밭이 아닙니다. 말씀 조심하시죠." 한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순간 하린이 내 다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겁먹은 게 느껴졌다.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내 안의 뭔가를 건드렸다. "이 아이 앞에서 그런 말씀 삼가주세요." "삼가고 말고는 제가 정합니다." 한서준이 하린을 향해 한 발 다가섰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하린을 감싸 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궁 안의 그 누구도 이 아이 손끝 하나 건드리게 둘 수 없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낮은 목소리였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서늘한 목소리였다. 오 년 밭일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지킬 게 있는 사람은 목소리부터 달라진다는 거였다. 한서준이 걸음을 멈췄다. 알현실 안의 시선이 전부 내게 쏠렸다. 강태오는 곤란한 얼굴로 나를 봤고, 강지훈은 흥미롭다는 듯 웃었고, 강도현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촛불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공주님께서 많이 변하셨군요." 한서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투 속에 담긴 건 경고인지 평가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오 년 전의 나였다면 고개부터 숙였을 것이다. 눈도 못 마주치고 벌벌 떨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내 뒤에는 지켜야 할 게 있었다.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이랬는데, 그땐 몰라주셨나 봅니다." 내 말에 강도현이 픽 웃었다. 강지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한서준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굳었다. 저 표정, 처음 봤다. 오 년 만에 이 남자한테서 처음 보는 얼굴. 알현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몰리는 자리였는데, 지금은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강태오가 자리에서 몸을 살짝 움직였다. 뭔가 말을 하려다 참는 기색이었다. 강지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의 결이 조금 전과는 달랐다. 흥미가 아니라 계산이 섞인 웃음이었다.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알현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곳에서의 오 년 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싸움이 될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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