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원 한가운데 작은 우물이 있었다. 오 년 전에도 있던 그 우물이었다.
달빛이 우물 벽돌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낮에 그렇게 시달렸는데도 발이 여기로 온 건, 어릴 때 이 우물가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죽이던 버릇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였다. 사람이 죽으란 소리를 들어도 습관은 안 죽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다가가 보니 우물가에 뭔가 반짝이는 게 떠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에 은은한 초록빛을 내는 작은 존재. 날개가 달려 있었고, 사람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반딧불이인가 했다. 근데 반딧불이가 팔짱을 낄 리는 없잖아.
"……뭐지, 이건."
내가 중얼거리자 그 존재가 홱 돌아봤다. 표정까지 있었다. 그것도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
"뭐긴 뭐야, 정령이지."
반말이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한 반말. 나이도 안 물어봤는데 벌써 서열이 정해진 기분이었다.
"정령이 말을 하네요."
"당연하지, 내가 몇백 년을 여기서 살았는데. 몇백 년 살았는데 벙어리면 그게 억울하지 않겠어?"
일리 있는 말이라 반박을 못 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왕실 비전에 정령이 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대뜬 반말로 인사받을 줄은.
"이름은 있어요?"
"여울. 이 우물 이름 따서 지었어. 부모가 지어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지었으니까 진짜 이름이지."
"저는 강서윤이에요."
"알아. 공주잖아. 여기 왕실 사람들 다 알아. 내가 우물 지킨 지 몇백 년인데 그 정도 정보력도 없으면 그게 정령이야, 백수지."
여울이 날개를 팔랑이며 내 어깨 위로 날아왔다. 가까이서 보니 눈코입이 다 있었고 표정도 다양했다. 지금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너, 오 년 전엔 나 못 봤잖아."
"네?"
"내가 보이는 사람은 정해져 있거든. 오 년 전 넌 안 보였는데, 지금은 보이네."
무슨 소린지 몰라 나는 눈만 깜빡였다. 여울이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중고차 딜러가 사고 이력 조회하는 눈빛이었다.
"뭔가 변했다는 거지. 그 뭐냐, 근본이."
"근본이 뭐가 변해요."
"몰라,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사람 근본이란 게 원래 그렇게 쉽게 안 변하는데, 넌 뭔 일을 겪었는지 아예 뿌리부터 달라졌더라. 어쨌든 넌 이제 나랑 대화가 되는 사람이 됐어. 축하해."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사이 달라진 게 근본이라면, 그 근본을 바꾼 게 뭔지는 나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이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면, 뭐라도 하나쯌은 바뀌지 않겠나.
"그래서, 정령은 뭐 해줄 수 있는 거예요?"
"뭘 바래?"
"음, 궁정 정치 안 망하게 도와주기?"
"그건 못 해. 나 그냥 우물 지키는 애야. 사람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큰일 나. 나 여기서 몇백 년 산 것도 다 그 규칙 지켜서 그런 거야."
"그럼 뭐 하러 말 건 거예요."
"심심해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웃는 것 같았다. 몇백 년 산 존재의 대답이 초등학생 하굣길 대답이랑 똑같다는 게, 왜 이렇게 웃긴지.
"심심하면 다른 사람이랑 놀지, 왜 나예요."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인다니까. 너처럼 근본 바뀐 애가 흔한 줄 알아? 몇백 년에 몇 명 나올까 말까야. 그러니까 넌 좀 특별한 케이스라고, 영광으로 알아."
"영광까지는."
"됐고."
여울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팔랑이던 날개도 잠시 멈췄다.
"경고 하나는 해줄게. 이 궁, 겉보기랑 속이 완전 달라."
"그건 저도 알아요."
"아니, 네가 아는 것보다 더 심해. 회색 머리 그 사제, 걔 겉으론 순한 척하는데 속은 완전 딴판이야. 가족들한테는 특히 더."
한서준을 말하는 거였다. 오늘 낮에 겪어본 바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령이 콕 집어 말해주니 등골이 서늘했다. 몇백 년을 이 우물에 박혀 있던 존재가 굳이 그 이름을 꺼낼 정도라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지저분한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딴판이길래요."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우물이 전해주는 건 파편이지, 완전한 그림이 아니거든. 근데 확실한 건, 그 사제 앞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거야. 특히 너처럼 근본 바뀐 애일수록."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거기까지. 나도 다 알고 말하는 거 아니니까 캐묻지 마."
여울이 손사래를 쳤다. 정령이 손사래 치는 모습이라니, 이 궁에 들어온 지 며칠 됐다고 벌써 별의별 걸 다 보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여울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곧 서라 왕국에서 사람이 올 거야."
"서라 왕국이요?"
"응. 그것도 네가 아는 사람."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서라 왕국.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딱 하나 있었다.
"누구, 누군데요."
"그건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그냥 우물이 그렇게 속삭였어."
"우물이 속삭였다는 게 뭔 소리예요."
"몰라, 나도 우물이 하는 말 다 이해 못 해. 우물이란 게 원래 그렇게 친절하게 자막 달아서 알려주는 존재가 아니거든. 그냥 느낌으로, 그림자로, 이런 식으로 전해줘. 여하튼 온대. 조만간."
나는 이도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 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얼굴. 하린을 낳기 직전 헤어진 그 사람.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를 봤던 눈빛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서라 왕국의 기사단장이자 왕족 서자인 그 사람이라면. 이 대륙에서 서라 왕국과 이 궁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이는 딱 한 명뿐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여울이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몇백 년 산 정령의 눈에도 티가 날 정도로 내 표정이 무너졌던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아니긴, 완전 딴 사람 됐는데. 방금까지 웃던 애가 갑자기 시체처럼 굳었잖아."
시체 비유는 좀 심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이도현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것도 이 궁에, 하린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하린은 그 사람의 존재를 아예 모른다. 나조차 오 년 동안 그 사람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거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궁정 암투에 정체 모를 사제까지 얹혀 있는 판에, 이제는 옛날 인연까지 끼어드는 건가. 인생이 무슨 드라마 시즌 오프닝처럼 등장인물을 하나씩 소환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여울이 다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넌 이제 나 보이는 사람이니까, 앞으로 종종 놀러 와. 심심하니까."
"저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닌데."
"그럼 나중에 오든가. 나 몇백 년 살았어. 기다리는 거 하나는 자신 있어."
여울이 훌쩍 날아 우물 속으로 사라졌다. 초록빛이 물속으로 잠기며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우물을 내려다봤다. 검은 물 표면에 내 얼굴이 흔들리며 비쳤다. 표정이 엉망이었다.
서라 왕국 사람. 내가 아는 사람.
그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하린을 데리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정말 그 사람이 온다면, 하린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빠라고 소개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가야 하나.
어느 쪽이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원을 벗어나는 내내 등 뒤로 우물이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우물 속 그 존재가 아니라, 이 궁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다른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회색 머리, 순한 얼굴, 그 뒤에 숨겨진 딴판인 속내.
한서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 등골이 다시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