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붉은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밀려 나오는 걸 본 순간, 나는 이도현으로서 처음으로 확실히 겁이 났다.
'이거, 4등급 심사에서 나올 규모가 아닌데.'
숫자를 세는 것부터 포기했다. 스물, 서른, 아니 그 이상. 붉은 눈들이 겹치고 겹쳐서 어둠 자체가 눈을 뜬 것처럼 보였다.
'심사장에서 이런 게 튀어나오는 게 정상인가?'
정상일 리가 없었다. 4등급 미궁 심사라면 몬스터 웨이브가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어야 했다. 누가 봐도 이건 사고였고, 우리는 그 사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뒤로 물러날 통로 같은 것도 없었고, 애초에 여기서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버텨!"
나는 검을 뽑으며 외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목청이 아니라 검이었다.
앞장서서 달려드는 몬스터들—늑대형, 곤충형, 종류를 가릴 새도 없었다. 늑대형은 턱을 벌리고 달려들었고, 곤충형은 다리 여섯 개를 접었다 펴며 튀어 올랐다. 나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베어냈다. 판별할 여유 같은 건 사치였다.
'분류는 나중에 하자. 살아서.'
준서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앞을 막을게요!"
의외로 목소리가 컸다. 수줍은 애가 저렇게 소리칠 줄은 몰랐다.
준서는 우리 파티에서 제일 말이 없는 편이었다. 방패를 다루는 솜씨는 훈련받은 것처럼 정확했지만, 정작 평소엔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딴사람 같았다.
방패에 몬스터 두세 마리가 동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쿠웅!
"버틸 만해요?"
서아가 뒤에서 물었다.
"버틸 만은 한데, 계속 오는 게 문제예요!"
준서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팔뚝에 힘줄이 튀어나온 게 보였다.
하늬는 뒤쪽에서 마법을 쏟아냈다. 불덩이가 몬스터 무리를 태우고, 그 자리를 다른 몬스터가 채웠다.
하늬는 마법사 라인 중에서도 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만큼 마나 소모도 컸다. 지금처럼 연속으로 큰 마법을 갈기고 있으면 얼마나 버틸지 계산이 안 됐다.
"이거 끝이 없잖아!"
하늬가 소리쳤다.
'그러게, 나도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속으로 대꾸하며 계속 검을 휘둘렀다. 손바닥에 땀이 차서 검자루가 미끄러웠다.
서아는 축복과 치유를 번갈아 걸며 우리를 지탱했다. 손에서 빛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서아는 우리 파티의 유일한 힐러였고, 그만큼 부담도 컸다. 다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서아의 손이 바빠졌다.
"도현아, 조심해!"
서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곤충형 몬스터가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틀어 검을 박아넣었다.
푸욱!
검 끝에서 검은 피가 튀었다. 옷에 묻은 피가 뜨끈했다. 냄새는 역했다. 뭔가 썩은 것 같은 냄새.
'이거 세탁비는 누가 물어주나.'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은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몬스터의 파도는 한번 밀려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다음 파도가 밀려왔다. 마치 미궁 자체가 살아서 우리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앞줄이 쓰러지면 뒷줄이 그 자리를 채우고, 그 뒷줄이 또 쓰러지면 또 다른 무리가 밀려왔다. 끝이 안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검을 휘두르는 각도가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팔이 저릿한 게 아니라 이제는 감각이 흐릿해지는 수준이었다.
"준서 씨, 방패 상태 어때요?"
서아가 소리쳤다.
"금이 가고 있어요.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아요!"
준서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앞쪽 몬스터 무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팔이 저릿했다. 체력은 아직 버틸 만했지만, 이대로 계속 소모전을 하면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는 거야.'
숫자로 밀어붙이는 상대한테 체력전으로 맞서는 건 원래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저쪽은 무한리필이고 이쪽은 한정판이었으니까.
"하늬 씨, 큰 거 한 번 더 갈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마나가 얼마 안 남았어요……!"
하늬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지팡이를 쥔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서아가 짧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야?"
돌아보니 서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끊이지 않던 빛이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나도 마나가……별로 안 남았어."
서아가 힘겹게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힐러의 마나가 바닥났다는 건, 이 전투에서 우리를 지탱할 방법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서아의 치유가 없으면 우리는 그냥 상처를 쌓아가면서 죽어가는 거였다.
하늬도 마나가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둘 다 동시에.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이런 건 좀 순서대로 떨어지면 안 되나.'
속으로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머리가 이렇게라도 딴소리를 해야 버틸 수 있었다.
"이거 진짜 큰일이네."
준서가 방패를 다시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섞였다. 방패에 이미 금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게 보였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몬스터의 다음 파도가 또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밑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앞으로 나섰지만, 등 뒤로 서아와 하늬가 더 이상 마나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짓눌렀다.
'이대로면 다 죽는다.'
계산이 딱 그렇게 나왔다. 힐이 끊기고, 마법이 끊기고, 방패마저 깨지면 남는 건 나 하나였다. 나 혼자서 이 파도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준서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요?"
서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준서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방패로 몬스터 하나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쿠웅!
"제 스킬 중에 하나가……좀 특수한 방식이라, 지금 말하기가 좀 그런데요."
"그런 거 가릴 상황 아니에요, 빨리 말해요!"
하늬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짜증과 다급함이 반씩 섞여 있었다.
준서는 방패 뒤에서 숨을 몰아쉬며, 결국 입을 열었다.
"제 스킬은…… 상대방과 스킨십을 하면, 그 사람의 마나를 회복시켜줄 수 있어요."
순간 전투의 소음마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서아도, 하늬도, 나도 잠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스킨십으로 마나를 회복시켜준다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곧 온갖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그게 정확히 어느 수준의 접촉을 말하는 건지, 손을 잡는 정도인지 아니면 다른 걸 말하는 건지, 지금 저 표정을 보면 후자에 가까운 것 같은데—
몬스터 무리는 여전히 밀려오고 있었다.
준서의 얼굴이 방패 너머로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저 상황에도 부끄러움을 느낄 여유가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근데 왜 나까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지.'
늑대형 몬스터 한 마리가 우리 대열의 틈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콰앙!
준서의 방패가 그걸 막아내며 다시 한번 금이 갔다. 이번엔 소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다음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요."
내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준서는 대답을 못 했다. 방패를 고쳐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몬스터 무리 뒤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훨씬 크고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렸다.
'저건 또 뭐야.'
파도 뒤에 파도가 아니라, 이번엔 그 파도를 몰고 오는 게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