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제물이 여신을 길들이다

1화

정신을 차렸을 때 강서아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한기와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을음 냄새가 이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 '덥다, 춥다, 뭐야 이거.' 등판을 타고 오르는 냉기가 이불 밑에서 뒤척이다 만 것처럼 익숙하지 않아서, 서아는 잠결에 이불을 걷어찼나 싶어 손을 뻗었다가 손끝에 닿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거친 밧줄이라는 걸 깨닫고서야 정신이 확 들었다. 눈을 뜨자 낮게 깔린 향 연기 사이로 낯선 얼굴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하나같이 회색 두건을 눌러쓴 채 입술만 웅얼거리며 무언가를 읊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저예산 영화의 엑스트라들처럼 어색하게 겹쳐 보였다. '이게 뭐야.' 서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손목과 발목이 굵은 밧줄로 제단 모서리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닫고서야,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밧줄을 당겨보았지만 손목을 파고드는 섬유의 결이 살갗을 스치며 따끔거릴 뿐, 매듭은 조금도 헐거워지지 않았다.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상당히 공들여 묶은 듯, 마디마디가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묶는 것도 정성이네.' 어이없는 감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서아는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단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나선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을 눈으로 훑는 순간 서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딱, 하고 맞아 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거… 명암록 프롤로그잖아.' 밤새 반복해서 클리어했던 게임의 오프닝 컷신이, 그것도 자신이 수백 번은 스킵했던 그 제물 의식 장면이, 지금 눈앞에서 실사로 재생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돌바닥에 새겨진 나선 문양을 하나씩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그 끝이 제단 중심의 작은 홈으로 모이는 구조라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컷신에서는 그저 배경 텍스처로 스치듯 지나갔던 부분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저 홈에 무언가—혹은 누군가의 피가—채워지는 용도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저기에 내 피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과 동시에, 서아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초현실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두건을 쓴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서아는 그것이 청록마을 사람들이 매년 치르는 헌제의 서문이라는 걸 게임 로어 텍스트로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이 상황을 낯설어하는 대신 이상하게도 침착함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노인의 목소리는 늙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져 있었고, 그 뒤로 늘어선 사람들의 두건 아래로는 여기저기 흰머리와 굽은 등이 눈에 띄었다. 청록마을은 척박한 땅 위에 세워진 작은 촌락이었고, 이 헌제 의식은 그해 흉작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라는 걸 서아는 로어 텍스트에서 스치듯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지.' 알고 있는 지식이 오히려 서아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저들에게 자신은 재앙을 막아줄 제물일 뿐이었고, 그들의 절박함을 이해한다고 해서 이 밧줄이 풀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손끝이 밧줄에 쓸려 따끔거리는 감각, 향의 매캐한 냄새가 기도를 조여오는 느낌, 주변 사람들의 낮은 흐느낌 소리—이 모든 것이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으로 밀려들자, 서아의 심장은 게임 설정을 떠나 순수한 공포로 뛰기 시작했다. 특히 흐느낌 소리가 문제였다. 두건 아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도 이 의식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저 흐느낌은 서아를 향한 애도인 걸까, 아니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한탄인 걸까. '알 바인가.' 냉정하게 끊어내려 했지만, 정작 심장은 그 흐느낌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제물이 된 여자애가… 누구였더라.' 서아는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지만, 이 시대는 게임 본편 시점보다 오천 년이나 앞선 과거였고, 프롤로그 나레이션에서 스치듯 언급되는 배경 설정에 불과했기에 구체적인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기억을 헤집을수록 오히려 불안감만 커졌다.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은 존재였다는 건, 이 의식이 끝난 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게임 설정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죽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변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그런데 왜?' 왜 자신이 이 순간, 이 몸에 들어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뒤늦게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은 그 답을 찾을 여유조차 없었다. 제단 옆에 놓인 작은 화로에서 불씨가 튀어 오르는 순간, 노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며 의식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걸 서아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짙어지며 매운 향이 코끝을 찔렀고, 그 냄새 사이로 은근하게 섞여 있는 것—피 냄새인지, 아니면 오래된 나무가 타는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 냄새가 서아의 목구멍을 조여왔다. 두건 쓴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치켜들었고, 제단 뒤편의 공기가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어둠은 밤의 색이 아니라 빛을 삼키는 색이었다. 서아는 그 어둠을 눈으로 좇으며 숨을 죽였다. 밤하늘의 어둠은 별빛이라도 품고 있는 법인데, 저 어둠은 그런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모든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화면 저편에서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오직 그 한 점만 칠흑으로 도려낸 것처럼. '설마.' 서아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제단 위로 그림자가 스며들듯 번져 올랐고, 사람들의 웅얼거림이 일순간 완전히 멈췄다. 그 정적은 오히려 소리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방금까지도 낮게 이어지던 흐느낌과 웅얼거림이 뚝 끊기자, 서아의 귓속에는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두근, 두근, 지나치게 선명한 그 박동이 마치 곧 닥칠 무언가를 예고하는 신호처럼 들렸다. 두건을 쓴 노인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치켜든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어둠이 짙어지는 제단 뒤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한가운데서, 무언가가—혹은 누군가가—천천히, 아주 천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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