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제물이 여신을 길들이다

4화

"그 애는 죽이지 마세요." 서아의 목소리가 제단 위를 울리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멈춘 채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았고, 누군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옆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았는데, 그 작은 움직임들이 겨울 공기 속에서 얼어붙은 숨결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다현 역시 뻗고 있던 손을 그대로 멈춘 채 서아를 응시했다. 손끝에서 넘실거리던 어둠이 그 순간 잠깐 멈추어, 오두막을 향해 뻗어나가던 검은 손가락 같은 형체가 허공에서 우두커니 굳어 있는 게 보였다. '말이 튀어나가버렸네.' 서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걸 느끼며, 이걸 대체 무슨 정신으로 내뱉었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밧줄에 묶인 손목이 시큰거렸고, 발밑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피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뒤섞인—가 코끝을 찔렀지만, 그런 감각들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아주 먼 곳의 일처럼 느껴졌다. "넌 이제 곧 죽을 몸인데, 남을 걱정할 처지가 되나." 다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서늘한 무심함이 배어 있었지만, 서아는 그 말투 어딘가에서 순수한 의문 같은 것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 질문의 형태는 완벽했으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온도는 낯설어 보였다. "당신, 저 마을 벌하려는 거잖아요. 근데 저 애를 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저 애는 그냥 제물로 뽑힌 애일 뿐인데." 서아는 자신이 지금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손목의 밧줄이 조여드는 통증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지금은 다현이라는 존재의 눈동자에 비해서는 사소한 일처럼 여겨졌다. "마을이 잘못했으면 마을 대표한테 책임을 물어야지, 애를 죽이는 건 그냥 화풀이잖아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제단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다현의 어둠이 흔들린 게 아니라, 다현 자신의 표정이—늘 무심했던 그 얼굴에—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눈매가 미묘하게 좁아졌다가 다시 펴지는, 사람의 눈으로는 놓치기 쉬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화풀이라고?' 다현은 오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을 향해 이런 방식으로 말을 건 존재를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 낯선 반박이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스스로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 애원하는 인간, 저주를 퍼붓는 인간—그런 얼굴들은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밧줄에 묶인 채로도 논리를 세우는 이 작은 존재는, 마치 낯선 짐승을 처음 마주한 사냥꾼처럼 다현을 잠시 멈춰서게 만들었다. 다현의 시선이 서아를 향해 다시 천천히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관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감정하듯 훑는 시선이었으나, 그 안에는 적의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이 더 짙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남을 대신 변호하고 있는 건가."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서아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는데, 그 반응이 오히려 다현에게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가왔다. 서아 자신도 이 상황이 낯설었다. 죽음이 코앞인데 왜 남의 목숨부터 챙기고 있는 건지, 그것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아이의 목숨을. 인간이란 존재는 두려움 앞에서 애원하거나, 아니면 침묵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정상이었다. 그것이 다현이 지금까지 지켜본 인간의 전형이었고, 그 전형에서 벗어난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는 두려워하면서도 논리를 세우고, 논리를 세우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성을 스스로 인정하는—다현으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종류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손안에 쥐고 있던 작은 짐승이 갑자기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달까. 다현은 뻗었던 손을 슬며시 거두어들였고, 오두막을 향하던 어둠도 서서히 옅어지며 사라져갔는데, 그 변화를 지켜본 노인과 마을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제단 주위로 낮게 퍼졌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은 채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겨울바람에 섞여 제단 아래로 흩어졌다. 서아는 그 안도의 파도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두막에 갇힌 아이를 향한 것임을 알았기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밧줄에 묶인 손이 여전히 저렸지만, 적어도 그 아이는 지금 당장 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자신의 목숨보다 먼저 안도가 되었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이상했다. "이름이 뭐지." 다현이 묻는 그 짧은 질문에, 서아는 순간 이 상황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갔다는 걸 직감했다. 방금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흥정하던 자리였는데, 갑자기 이름을 묻는 목소리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들려서 순간 당황스러웠다. "강서아요." "강서아." 다현이 그 이름을 낮게 되뇌는 순간, 서아는 자신의 이름이 이 존재의 입술 위에서 발음되는 게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낮고 서늘한 음성이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굴리는 소리는, 마치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낯설면서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울림을 남겼다. '이름을 왜 물어보는 거지.' 서아는 그 질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마른침을 삼켰다. 죽일 사람의 이름 따위는 굳이 알 필요가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이것이 뭔가 다른 신호는 아닐까 하는 얕은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기대를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현은 잠시 서아를 내려다보다가, 마을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보겠다." 그 말투는 여전히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으나, 그 속에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결이 섞여 있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다시 한번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는데, 그것이 사형선고의 유예인지, 아니면 완전한 방면인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현의 형체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올라 몸 전체를 감싸더니, 마치 밤이 그녀를 삼키는 듯한 모습으로 서서히 옅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가운 밤공기와,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어렴풋이 남은 서늘한 기운뿐이었다. 서아는 그 뒷모습—혹은 사라지는 잔상—을 바라보며, 이것이 끝인지 아니면 시작인지 판단할 수 없어 밧줄에 묶인 손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벌어진 일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서아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서아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제물로 끌려온 낯선 이방인을 보던 눈빛과는 사뭇 다른, 어딘가 조심스럽고 계산적인 눈빛이었다. 노인이 천천히 다가와 서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 속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저 신께서…… 다시 생각해보겠다니." 노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서아는 그 말을 들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는 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밧줄에 묶인 손목을 내려다보며, 서아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건드린 것인지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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