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왕궁을 벗어난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왕도의 대로를 빠져나가는 동안, 설이연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바라보며 오늘 밤 벌어진 일들을 곱씹었고, 흔들리는 마차 바퀴 소리는 마치 그녀의 심장이 두드리는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덜컹, 덜컹.
마차가 돌길 위를 지날 때마다 몸이 흔들렸지만, 그 물리적인 흔들림보다 더 크게 설이연을 흔들어놓는 것은 조하린의 그 웃음, 승리감에 젖은 그 짧은 눈빛이었다.
'설마 그 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아니, 그럴 리가……'
연회장의 불빛 아래에서 조하린이 지어 보였던 그 미소는, 겉으로는 우아하고 흠 없는 귀족 영애의 것이었으나, 그 안쪽에는 분명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설이연은 놓치지 않았고, 손끝으로 잔을 매만지던 그 여유로운 손짓 하나에서도 어떤 계산된 의도가 느껴졌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놓인 화병, 그 안의 꽃…… 그건 분명 우연이 아니었어.'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온실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고, 그 순간 열두 살 무렵의 기억이 통째로 떠올랐다.
청하 백작가의 정원 한구석, 아무도 찾지 않던 낡은 유리 온실 안에서 설이연은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어머니가 남긴 식물 도감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그녀는 그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바깥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안온함을 느꼈다.
낡은 나무 선반 위에는 말린 잎사귀와 뿌리 표본들이 종이봉투에 담긴 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설이연은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냄새를 맡아보고, 색을 살피고, 도감의 그림과 대조해보는 일을 세상 무엇보다 좋아했었다.
"또 그 지겨운 풀 뿌리 그림이나 들여다보고 있구나."
사촌 언니들이 지나가며 던지던 그 말속에는 늘 옅은 비웃음이 섞여 있었고, 설이연은 그때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도감을 더 꽉 끌어안는 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시집도 못 가겠어, 이연아. 누가 풀 냄새 나는 신부를 데려가겠니."
또 다른 사촌이 낄낄거리며 덧붙이던 말에도, 설이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저 손끝으로 도감의 낡은 페이지 모서리를 조용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사교계 데뷔 무도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파트너와 나눌 화젯거리라고는 최근 발견된 신종 이끼의 서식 조건뿐이었던 설이연을 두고, 귀족 자제들은 뒤에서 낮게 수군거리곤 했다.
"저 아가씨랑 대화하다 보면 온실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까."
"맞아, 눈은 예쁜데 입만 열면 재미가 하나도 없어."
그 조롱 섞인 말이 돌고 돌아 결국 본인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때조차, 설이연은 상처받았다는 감정보다 오히려 '온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는 데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온실…… 나는 온실 속에서만 진짜 나일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식물은, 특히 독을 지닌 식물은, 사람과 달라서 배신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그 성질을 드러냈으며, 연구하면 연구한 만큼 답을 내어주었기에, 설이연은 사람보다 독초를 신뢰하는 법을 먼저 배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녀는 그 지식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동시에 그 지식 때문에 더욱 깊은 의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곱씹으며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는 순간, 설이연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창밖을 살폈고,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선 낯선 기마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다가 뚝 끊기고, 그 뒤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멈추시오."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마부가 당황한 기색으로 창문 밖에서 뭔가를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내 마차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큰 키에 어깨가 넓고, 짙은 흑발이 밤바람에 흩날리는 그 남자의 눈동자는 마치 서리가 내린 겨울 호수처럼 차갑고 깊었으며,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마치 조각처럼 정갈하게 다듬어진 얼굴이었다.
턱선은 서늘하도록 곧게 뻗어 있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덜미의 선조차 흐트러짐이 없어, 마치 오랜 시간 훈련된 군인의 몸가짐이 그대로 얼굴에까지 새겨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설이연 양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하빈 변경백, 강하온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설이연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는데, 북부 변경을 지키는 실무형 영주로 왕도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고, 사교계에는 얼굴을 거의 비치지 않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왕도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그의 이름이 화제로 오르곤 했는데, 그 내용은 언제나 비슷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 사교의 예를 모르는 무뚝뚝한 변경백, 그러나 전장에서는 병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지휘관이라는 것이었다.
"오늘 밤 벌어진 일은 이미 소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강하온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고, 설이연은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조롱이나 동정의 기색을 찾으려 했으나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도 결국 그 소문을 듣고 나를 구경거리로 여기러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강하온의 눈빛에는 흥미나 경멸의 그림자조차 없었고, 오히려 그것보다 더 절박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설이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제 영지, 하빈령에는 지금 알 수 없는 병이 돌고 있습니다. 환자들이 잠에서 깨지 못한 채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어떤 의술로도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보고서를 읊는 듯한 담담함이 배어 있었는데, 설이연은 그 담담함 속에 숨겨진 무게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방금 연회장에서, 그대가 독초를 알아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강하온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움직였고, 설이연은 그 시선 속에서 조롱이 아닌 다른 것, 절박함과 비슷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연회장에 계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을 뿐입니다."
그 짧은 대답에서 설이연은 왕도의 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퍼지는지를 다시금 실감했고, 동시에 그 소문 속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 영지로 오셔서, 그 병의 원인을 찾아주십시오."
"……"
"보상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습니다."
설이연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는데, 갈 곳도 없고, 돌아갈 가문의 얼굴도 없는 지금의 처지에서, 이것이 어쩌면 유일한 선택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낯선 남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이 앞섰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 사이도 아닌 나에게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절박함이 이런 무례를 감수하게 만든 것일까, 설이연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실례지만, 왜 하필 저입니까."
강하온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필요하니까요."
그 짧은 말에 담긴 무게가, 그동안 자신을 두고 쏟아졌던 그 어떤 화려한 찬사보다도 더 무겁게 가슴을 울렸다는 것을, 설이연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강하온의 흑발을 흩트려놓았고, 그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설이연을 정면으로 응시했는데, 그 시선에는 거짓도, 과장도, 어떤 계산도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어서 나를 찾아온 걸까.'
설이연은 마차 문틀을 붙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고,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밤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침묵 속에서 설이연은 자신이 이미 어떤 대답을 향해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