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택 생활 사흘째, 나는 슬슬 이곳의 규칙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침은 종이 울리면 시작됐다.
댕, 댕, 댕—
세 번 울리면 기상, 다섯 번 울리면 식사 시작이라는 걸 몸으로 익힌 참이었다.
전생에 알람 세 개씩 맞춰놓고도 못 일어나던 인간이 종소리 하나에 눈을 뜨게 됐다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뭐, 사람 몸이 죽으면 습관도 리셋되는 모양이었다.
정화 작업은 오후에 몰려 있었다.
오전엔 장기 농도가 옅어서 크게 손댈 게 없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저택 근처 결계에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든다고 했다.
그 시간에 나는 손끝에서 빛을 짜내며 안개를 밀어내는, 말 그대로 '성녀 노동'을 했다.
노동청에 신고하고 싶은 근무 강도였지만, 여긴 노동청이 없으니 참는 수밖에.
그리고 어딜 가든 나를 따라붙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종자 박현.
나이는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였는데, 표정이 항상 뭔가 못마땅한 듯한 얼굴이었다.
식사 시간에도, 정화 작업을 나갈 때도, 심지어 방 앞 복도를 지나칠 때도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처음엔 신경이 쓰였는데, 사흘쯤 되니 오히려 없으면 허전한 지경이었다.
이거 사육당하는 기분인데, 나쁘진 않네.
"성녀님, 어디 가십니까."
"정원 좀 걸으려고요."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공작님의 명입니다."
그가 딱딱하게 대답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감시인지 보호인지 구분이 안 가는 태도였다.
마치 회사 다닐 때 나를 못 믿는 상사가 자꾸 옆에서 확인하는 느낌.
'김 대리, 그 보고서 다 됐어? 진짜?' 하면서 세 번씩 확인하러 오는 그런 상사.
박현이 딱 그 상사 포지션이었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 자갈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각, 사각—
두 사람 발소리가 겹치면서 이상한 리듬을 만들었다.
나는 그 리듬이 어색해서 괜히 말을 붙였다.
"저기, 박현 씨."
"박현입니다. 씨는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박현."
"…예."
대답이 살짝 늦었다.
존댓말에서 반말로 넘어가는 게 익숙하지 않은 눈치였다.
이 사람, 위계질서에 목매는 타입인가.
"제가 뭐 도망갈까 봐 이렇게 붙어 다니는 거예요?"
"그, 그런 건 아닙니다."
말이 끊어졌다.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목덜미까지 살짝 붉어진 걸 보니, 거짓말에 서투른 부류인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성녀님의 안전을 특별히 신경 쓰라 하셨습니다. 장기 지역이 가까워 위험할 수 있으니."
"흠, 그렇구나."
나는 정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칙칙한 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전생 서울의 미세먼지 심한 날씨랑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건 마법적 재난이라는 것.
마스크 하나 없이 저 구름 아래를 걸어야 한다는 게, 가끔은 억울하기도 했다.
정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시든 장미 넝쿨 사이로 그나마 살아 있는 꽃 몇 송이가 버티고 있었고, 분수는 절반쯤 얼어붙은 채 멈춰 있었다.
돈 지랄로 지은 정원이 이 지경이라니, 장기라는 게 참 무섭구나 싶었다.
"박현은 여기서 오래 일했어요?"
"칠 년째입니다."
"칠 년이면 거의 터줏대감이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공작님은 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내 질문에 박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고,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참는 얼굴, 딱 그거였다.
"…공작님은 원래 이렇게 차갑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영지의 장기가 심각해지면서부터, 많이 변하셨습니다."
박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정원 너머, 안개가 낀 들판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뭘 보고 있었던 걸까.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방관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참이었으니까.
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장기를 정화하고,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조용히 살다 죽으면 그만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한 차례 스치며 시든 잎을 몇 개 떨어뜨렸다.
바스락, 바스락—
그 소리마저 이 저택의 침울한 분위기에 어울려서,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성녀님."
박현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네?"
"공작님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방금까지 딱딱한 업무 모드로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소리를 하니, 나도 모르게 등을 곧게 세웠다.
"…왜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말이 다시 끊겼다.
박현의 눈빛에 경계와 걱정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마치 나를 지키고 싶은데, 동시에 나를 밀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긋난 태도라고 해야 할까.
이런 애매한 태도, 전생 드라마에서 많이 봤는데.
보통 저런 대사 치는 조연은 뒷사정이 복잡한 경우였다.
"저 술 마시기로 계약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저택 전체에 이미 퍼졌습니다."
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꽤 깊어서, 나는 순간 내가 뭔가 큰 사고를 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라서요, 공작님께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신 게."
"처음이요?"
"예. 지금까지 어떤 계약자에게도 그런 걸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최시우가 의외로 술을 좋아하나 보다, 정도로 넘겼다.
하지만 박현의 표정을 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표정엔 놀람과 불안, 그리고 아주 살짝의 서글픔 같은 게 뒤섞여 있었다.
"박현."
"예."
"공작님 걱정 많이 하는구나."
내 말에 박현이 순간 얼굴을 붉혔다.
붉어지는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그, 저는 그저 종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말투가 딱딱해졌다.
부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확신을 줬다.
이 사람, 최시우를 진심으로 걱정하는구나.
감시와 보호가 뒤섞인 이 이상한 태도의 이유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주군에 대한 충성인지,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이후로 별다른 대화 없이 정원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박현은 다시 원래의 딱딱한 얼굴로 돌아갔고, 나는 괜히 그의 옆얼굴을 슬쩍슬쩍 훔쳐봤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 최시우와 관련된 거겠지.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현이 문 앞에서 짧게 인사를 했다.
"편히 쉬십시오, 성녀님."
"수고했어요, 박현."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오늘 대화를 곱씹어봤다.
그날 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창밖의 장기 자욱한 들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저택에 얽힌 사정이 생각보다 복잡할지도 모른다는 것.
박현의 그 애매한 경고, 최시우가 처음으로 허락했다는 술 계약, 그리고 저택 전체에 흐르는 이 묘한 긴장감.
전부가 하나의 커다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방관자로 남기로 했으니, 굳이 깊게 알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인생 모토가 뭐였더라, '적당히 살자'였지.
이 세계에 와서도 그 모토는 지켜야 했다.
그런데 그 결심은, 며칠 뒤 열릴 영지 행사에서 크게 흔들리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행사에서, 나는 박현의 그 애매한 경고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