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청호 영지의 가을 축제.
장기 정화 이후 첫 공식 행사라며 저택 전체가 분주했다.
새벽부터 시녀들이 복도를 뛰어다녔고, 주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온 저택에 진동했다.
나는 성녀로서 참석해야 했고, 최시우는 공작으로서 인사를 돌아야 했다.
전날 밤 박현이 방문까지 찾아와 옷을 골라주며 신신당부를 했다.
"성녀님, 절대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주세요. 그냥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저 원래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그러시겠죠."
말투에 확신이 하나도 안 담겨 있었다.
이 사람, 나를 뭐로 보는 건지.
아무튼 대강당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귀족들이 옷을 갖춰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색색의 드레스와 예복이 물결처럼 오갔고, 악사들이 구석에서 현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눈이 즐겁네, 라는 감상이 절로 나왔다.
전생의 회사 워크숍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스케일이었다.
거기서는 회의실에 김밥 시켜놓고 부장님 건배사 듣는 게 하이라이트였는데, 여긴 뭐 나라 잔치를 하고 있었다.
돈 지랄 보소,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성녀님, 저쪽으로."
박현이 나를 한쪽 구석으로 안내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기둥 뒤편에 반쯤 가려진 위치라, 딱 보기에도 '여기 있는 듯 없는 듯 있으시오' 하는 배치였다.
"여기서 조용히 계시면 됩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관찰자로 남기로 한 결심을 지키기엔 딱 좋은 위치였다.
나는 벽에 등을 살짝 붙이고 서서 술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손에 들고 있으면 뭔가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전생 회식 자리에서 익힌 생존 스킬이었다.
멀리서 최시우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크니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어딘가 로봇 같았다.
누가 말을 걸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짧게 대답하고, 다시 다음 사람에게로.
감정 표현 기능이 삭제된 NPC 같은 느낌.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러다 표정 관리 근육이 굳어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냥 계약 상대일 뿐인데.
주 1회 술자리나 함께하는, 딱 그 정도 관계인데.
근데 내가? 왜? 저 인간이 쳐다봤다고 심장이 이럴 일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붙잡고 있는 사이, 최시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물살이 큰 배를 따라 흐르는 것처럼, 시선들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나는 순간 도망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그가 코앞까지 와버린 뒤였다.
"서지은."
"공작님."
나는 격식을 차려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신경 쓰면서.
"이 자리에서는 좀 더 성녀답게 행동해줬으면 한다."
"성녀답게가 뭔데요?"
내 반문에 그가 잠시 멈칫했다.
정말로 잠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우아하게, 조용히, 시선을 끌지 않게."
"그럼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는데요."
나는 술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보세요, 저 지금 이렇게 벽에 붙어서 숨쉬기 운동만 하고 있잖아요."
최시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인데, 저 정도면 꽤 큰 반응이었다.
"…네 말투는 여전히 특이하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칭찬 아니다."
"그래도 들을래요."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온도를 느꼈다.
차갑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
마치 처음 보는 종의 생물을 관찰하는 학자 같은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나는 실험실 표본이 된 기분이었다.
'서지은종, 특이 행동 관찰 중.' 뭐 이런 표지판이 내 머리 위에 붙어 있는 것 같은.
그때 귀족 부인 하나가 다가와 최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화려한 진주 목걸이를 두른,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었다.
"공작님, 이번 정화 성공은 정말 청호의 경사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떠나기 전 나를 한 번 흘긋 보긴 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가 벽에 등을 붙였다.
됐다, 이 정도면 관찰자 역할 완수한 셈이었다.
남은 시간은 그저 사람들 구경하며 흘려보냈다.
누가 누구랑 붙어 다니는지, 어느 영애가 어느 귀공자를 힐끔거리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관찰이 은근히 재미있었다.
전생에도 이랬으니까, 회식 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사람들 관찰하는 거.
성격은 회귀해도 안 바뀌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밤에 벌어졌다.
행사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뒤, 나는 정원을 산책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주쳤다.
박현이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원래는 방으로 곧장 들어가려 했는데, 축제 내내 서 있느라 다리가 뭉쳐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는 생각이었다.
밤바람이 선선했고, 정원의 등불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고, 연못 표면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흔들렸다.
정원 끝, 연못가 벤치에 최시우가 홀로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를 못 알아봤다.
옷깃이 살짝 풀어져 있었고, 자세도 평소와 달랐으니까.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고, 병목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평소의 딱딱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최시우의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사라져'라는 명령이 울렸지만, 다리가 그 명령을 씹었다.
최시우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서지은."
목소리에 약간의 흐트러짐이 섞여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빛도 평소와 달랐다.
낮에 보았던 학자 같은 관찰의 눈빛이 아니라, 뭔가 더 젖어 있고 더 무너져 있는 눈빛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명령이 아니라 권유처럼 들렸다.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이 사람은 평소에 뭘 시킬 때 절대 저런 어조를 쓰지 않았다.
주 1회 술자리는 다음 주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마주칠 줄은 몰랐다.
계획에도 없던 변수였다.
관찰자로 남으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이왕 걸린 거, 도망칠 이유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저 흐트러진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평소엔 절대 안 보여주는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벤치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술병 안에서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고, 최시우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남자가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 사실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