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벤치에 앉는 순간,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독한 증류주 냄새였다.
한 잔 정도 마신 게 아니라 병째 들이부은 냄새.
옆에 앉은 사람이 무려 공작가의 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흐트러진 분위기였다.
"공작님, 많이 드셨나 봐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시우가 술병을 흔들며 대답했다.
찰랑, 소리가 났다.
거의 다 비운 병이었다.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원래 이 인간은 한 문장으로 끝낼 말을 세 문장으로 늘려 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묻지도 않은 말에 혼자 대답을 이어붙이고 있었다.
확실히 취한 게 맞았다.
나는 슬쩍 거리를 벌리며 앉았다.
취한 사람 옆은 언제나 리스크가 있는 자리였다.
전생에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 옆에 앉았다가 팔짱을 잡혀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이 남자는 팔짱을 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박현은 어디 갔어요?"
"급한 서신이 와서 자리를 비웠다. 곧 돌아올 거다."
곧 돌아온다니 그럼 잠깐만 버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기.
이 계약 관계에 들어온 이후로 내가 가장 자주 하는 행위였다.
버티고, 웃고, 적당히 받아치고, 또 버티고.
성녀 노릇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최시우라는 인간이 유독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건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지은."
갑자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너는 왜 술을 그렇게 원했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느낌.
취한 사람이 이렇게 직진으로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평소의 최시우라면 이런 사적인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역시 술의 힘이란 무섭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생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야 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답변을 빠르게 시뮬레이션했다.
'전생에 회사원이었는데 야근하다 죽어서요'는 당연히 탈락.
'그냥 취향입니다'도 왠지 더 캐물을 것 같아서 탈락.
결국 가장 안전한 답을 골랐다.
"그냥, 사는 게 재미없어서요."
"재미없다고?"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취한 상태에서도 반응은 예리했다.
"신전에서의 삶은 항상 정해진 대로였어요. 기도하고, 정화하고, 또 기도하고. 그 안에서 유일하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봤는데, 그게 술이더라고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조금 놀랐다.
거짓말인데, 반은 진심이었다.
전생이든 이생이든 정해진 틀 안에서 사는 건 늘 지긋지긋했으니까.
최시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술기운 탓인지 눈빛이 평소보다 흔들렸다.
원래 저 눈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게 기본값이었는데, 지금은 살짝 초점이 풀려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집중력이 느껴졌다.
이 사람, 취해도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은 못 버리는구나.
"…그런 이유였나."
"의외예요?"
"성녀가 그런 이유로 조건을 걸 줄은 몰랐다."
"성녀도 사람인데요."
내 대답에 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차가운 조각상 같던 얼굴에 잠깐 균열이 생긴 순간.
입꼬리가 아주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올라갔을 뿐인데도 그 낙차가 어마어마했다.
평소 표정이 영하 20도쯤 잔뜩 얼어붙어 있었으니, 이 정도 미소도 봄바람처럼 느껴졌달까.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아니, 왜.'
나는 속으로 반박하듯 되물었다.
지금 이건 그냥 놀란 거지, 다른 의미는 절대 아니다.
계약 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웃었다고 심장이 뛰는 건 프로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 정화 능력은, 진짜 마음이 편해야 발휘되는 게 맞나."
갑자기 진지한 질문이 날아왔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학구적인 눈빛으로 돌변한 최시우.
이 남자는 감정과 이성을 스위치처럼 켜고 끄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네, 대체로는요."
"그럼 지금 시험해보자."
"네?"
내 목소리가 살짝 뒤집혔다.
"저 연못. 아까부터 장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정화해봐."
그가 연못을 가리켰다.
어두운 수면 위로 검은 기운이 살짝 감돌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진했다.
물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녁 바람에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는 듯도 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정화 마법은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니었다.
집중력과 정신 상태가 안정돼야 하는데, 지금은 취한 공작 옆에 앉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상한 상태였다.
이건 마치 시험 전날 밤에 갑자기 쪽지시험을 보라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채로.
"지금은 좀…"
"왜, 못 하나."
최시우의 말투에 살짝 도발적인 기색이 섞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술기운에 어린애처럼 시험해보고 싶어진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인간, 취하니까 은근히 심술이 있구나.
평소엔 논리로 사람 몰아붙이더니 지금은 그냥 순수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못한다고 하면 성녀로서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꼴이었다.
계약 관계에서 무능력함을 보이는 건 곧 협상력의 하락이었다.
전생에 배운 짠내 나는 생존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되는구나 싶었다.
나는 마지못해 손을 뻗어 연못을 향해 정화의 힘을 끌어올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평소 정화할 때 쓰던 호흡법을 되새겼다.
들숨에 힘을 모으고, 날숨에 흘려보낸다.
평소라면 손끝에서 하얀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
빛이 나오다가, 이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실패였다.
연못의 검은 기운은 오히려 더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적나라한 굴욕의 순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생에 프레젠테이션 중 파워포인트가 갑자기 꺼져버린 그 순간의 부끄러움과 맞먹었다.
최시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표정에 실망이나 비웃음은 없었다.
대신 이상하리만치 깊은 흥미가 담긴 눈빛.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재미있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가요."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섞였다.
굴욕당한 사람 앞에서 재미있다는 말을 하는 건 실례 아닌가.
"성녀가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웃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
'흔들린다'는 표현이 자꾸 귀에 남았다.
정확히 뭘 보고 흔들린다고 하는 건지,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술 취한 남자 옆에 앉은 게 불편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우기고 싶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그 목소리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여기 계셨습니까!"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다급하게 가까워졌다.
박현이 나와 최시우를 발견하고 순간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에 스친 표정은, 당황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조합을 목격한 사람처럼.
"성녀님이 왜 여기…"
박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선이 나와 최시우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뭔가를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최시우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오늘 밤 벤치에서 벌어진 이 짧은 순간이, 앞으로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이건 단순한 계약 관계에서 벗어난, 뭔가 더 복잡한 감정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박현이 서둘러 다가와 나를 최시우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순간, 최시우가 낮게 말했다.
"박현. 다음 주 술자리, 앞당긴다."
박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이 남자가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한 것처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이 계약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성녀와 공작의 계약.
원래는 단순히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거래였을 뿐인데, 이 밤을 기점으로 뭔가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틀림의 중심에, 방금 굴욕적으로 실패한 정화 마법과, 처음 본 최시우의 미소가 있었다.